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1915년 결성된 신한혁명당은 고종(高宗) 황제를 국외로 탈출시켜 그 당수로 옹립해 독립운동을 펼치려 했다.
진보 성향이 강했던 이상설은 휘하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거느리면서 당시 보황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그의 망명을 추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되면 중국에서 일본과 독일의 이해가 충돌해 독립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고종을 운동의 맹주로 추대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가세해 1917년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전부터 조약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이를 막기 위해 외교 노력을 펼치는 한편 1909년 초 이상설 등의 추진으로 국외 망명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는 한일병합이 양국 황실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해온 일본 입장에 쐐기를 박은 단서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종은 조약 체결 전부터 초지일관 을사조약을 반대했고, 외교활동을 통해 막으려 했던 셈이다.
▲더구나 고종은 '(일본이) 보호령을 인정해달라고 강요하면서 본인을 밤낮으로 괴롭히고 있다'며 '그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적은 문서(주한 러시아영사관 소모프 총영사 명의로 1909년 1월 8일자 작성된 비밀 전보)가 2001년 발견된 바 있다.
그 이후 고종의 의문에 싸인 죽음은 북벽운동이나 입헌군주제 운동을 흔들었고,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게 했다.
▲'고종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전의(典醫)에 의해 독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김문길 교수는 최근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의 이 같은 말을 기록한 문건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1919년 1월 21일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전의 안상호가 독극물인 비소를 탄 홍차를 고종에게 먹여 독살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일본의 한 사학자가 입수해 보관해오다가 김 교수에게 진실을 밝혀달라며 보내온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쓰시마섬(對馬島) 도주(島主)와 강제로 결혼한 덕혜옹주가 평소 한 말을 절친했던 일본 여성이 옮겨 적었다는 이 문건은 다시 한 번 민족적 아픔과 비애를 떠올리게 한다.
학계는 이 주장에 당시 덕혜옹주는 7세에 불과해 독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그 무렵 파다하게 퍼졌던 '독살설'을 일본인 친구에게 전했을 가능성이 높아 아직 사실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아무튼 국권침탈에 끝까지 저항했던 고종은 당시 민족적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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