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과 세상-한의 구조 연구

천이두 지음

과거사. 그게 뭘까. 얽히고 설켰다니 그물 이름 같기도 하고 캐내야 한다니 무슨 걸출한 보석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로 휙휙 날아가 버리니 마치 태풍 이름인가. 정리되어야 한다니 반듯한 넓디넓은 들판 이름 같기도 하다.

한구석에서는 이를 빌미로 후비고 야단이니 마냥 귀이개 같기도 하고 저쪽 구석에서는 그럴수록 더 은폐하려 한다니 007 영화제목 같기도 하다.

과거의 역사. 어떻다는 것일까. 새삼 모든 일들을, 심지어 민생을 뉘어 놓을 만큼 절박하게 다가오는 과거의 역사는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엇들일까. 자백해야 하는 과거사들. 하늘의 총총 별만큼 많다.

왜곡되었고 진상이 필요한 과거사들. 그런데 문제는 왜 온 국민들이 여기에 너와 나 없이 지금 몰입해야 하는가. 역사가들이 미덥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딛고 또 딛고 그런 후 그 위에 우뚝 서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일까. 역사는 지금도 흐르고 과거사는 이 순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파스칼도 일갈했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물며 과거야말로 현재와 함께 수단이며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미래라고. 그래서 게오르규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붉게 영글어 물기 흠뻑 머금었을 때 한 알의 사과. 그런 미래는 왜 싫어할까. 지금 세계는 온통 미래가 어떻게 올까에 촉각이 곤두서 있는데 우리는 힘든 과거사를 힘들게 담금질하고 있다.

과거사를 용광로 속에서 이글거리는 쇳물로 여기면서.

대화를 해야 한다.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터놓고 말문들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만나는 법부터 배워야 하고 이를 토대로 진정한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

그저 스치는 만남은 안 된다.

문학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김춘수의 시 '꽃'을 한 번 읽어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래. 기분 좋게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러 주자. 그가 누구일까. 과거에 잊혔던 이름이라도 좋다.

이글거리는 용광로 이름이라도 좋고, 스쳐 지나갔던 이들이라도 좋다.

그저 이름을 한 번 불러 보자. 그러면 꽃이 되어 나에게로 온다지 않는가. 꽃이 되어 말이다.

'한의 구조 연구' 라는 책이 있다.

전북대에서 오래 교편을 잡았고 원광대에서 정년을 맞은 문학평론가 천이두 교수가 지었다.

그는 문학적 삶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늘 '한(恨)'을 내세우며 지난 93년 펴낸 책이다.

제목조차 연구라서 솔직히 대중적으로는 읽기가 결코 편안하지는 않다.

이에 앞서 10여년 전 '한국문학과 한'이라는 책을 이미 낸 바 있는 저자는 그 책이 미흡해 이 책을 냈다고 했다.

두 부로 나눠 꾸민 이 책은 논문이지만 그러나 전반부의 8편 논문은 한이라는 카테고리를 잘도 주무르며 해석해 준다.

한이 많은 민족.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 아닌가. 천 교수는 울음에서 웃음으로 가는 과정, 즉 불행과 비참의 긴긴 터널을 지나서 마침내 행복한 절망에 당도하는 것, 그것이 거의 모든 한국 서사문학의 구조, 그리고 특히 판소리 구조의 특징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것이 한국적 한의 역설이라고 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한국인은 인내와 극기로써 자기 한을 초극하여 간절한 성취동기(願)를 유발하며 한의 유인자에 대하여 관용의 자세(情)를 정립해 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문화에 볼 수 없는 한국적 한의 속성을 보게 된다… 원(怨), 탄(嘆)에서 시발한 한이 정(情), 원(願)에로 질적 변화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내재적 기능이 곧 삭임의 기능이다.

"

삭임의 기능. 중요한 대목이다.

지은이는 이를 한국 문화권에 있어서는 미각적(맛), 예술적(멋), 윤리적(슬기) 가치 생성의 기능에 두루 걸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삭임의 기능은 한국적 한의 내재적 기능이면서 한국인의 주체적 가치 지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여기서 한국적 한의 역설적 성격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온갖 글에서 한국적 한의 어두운 자락과 밝은 자락을 풀기에 앞서 삭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즉 한은 풀기보다는 삭임으로써 그 공격성과 퇴영성, 다시 말하면 원망과 한탄은 초극되고 정과 소원이 이룩돼 한은 삭인 후 풀어야 비로소 그 풀이 행위는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삭임과 풀이인가.

그래서 지금 우리의 과거사는 또 하나의 한풀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과거사 문제. 삭임과 풀이가 없는 게 정녕 문제로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