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역사는 청산 아닌 '극복'의 대상

과거사 청산 문제가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청산이나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청산'이니, '정리'니 하는 말들을 곧잘 입에 올린다.

청산하고 싶고 정리하고 싶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세월 뒤의 군사독재, 그 너머의 남북분단과 6.25전쟁, 그리고 이를 초래한 일제 식민통치의 비극 등…. 청산하고 정리하고 싶은 과거의 역사는 정말이지 그 위 시대도 수두룩하다.

오죽하면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오욕의 역사를 들출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미상불 갖가지 악취가 풍겨나올 모양이다.

그러나 그 고약한 냄새 때문에 청산, 정리를 덮어두자는 주장은 옳지 않다.

아니, 오히려 가능하다면, 그 더러운 잔재를 깨끗이 청소하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잔재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속시원한 청소를 희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청산이 역사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에 있다.

답답하다.

답답하지만 그러나 할 수 없다.

역사가 선조적(線條的)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역사학자 EH 카아의 반세기 스테디셀러 '역사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역사란 아이러니이다.

정의와 선이 승리하고, 그 바탕 위에서 다시 정의와 선이 확장된다면 좋으련만, 그렇기는커녕 때론 그 반대의 현상도 일어나고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도리어 엉뚱한 결과를 빚어내기도 하는 역사…. 그래서 아예 역사란 믿을 게 못된다는 일종의 비관론자도 있었다.

19세기의 J 부르크하르트 같은 역사학자도 말하자면 이런 부류에 속했고, 물론 그 외에도 많다.

이런 비관론자들을 역사와 현실의 답답함에 무릎꿇은 패배주의자들이라고 일갈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사실 그 이상의 대책은 없다.

한번 일어난 일은 아무리 발버둥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발버둥칠수록 이쪽의 기분만 언짢아지고, 마침내 분노의 감정만 증폭되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게된다.

과거는 잊지말되 뒤돌아보지는 말자는 잠언과 같은 다짐이 여기서 생겨난다.

청산, 정리아닌 극복의 논리도 이때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극복이란 대체 무엇인가. 극복에는 그 대상이 있다.

극복, 혹은 극복하려고 하는 자의 자리에서 볼 때 그 대상은 아예 없었으면 좋을,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들이나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했었고, 지금도 그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어 못마땅하다.

이때 극복은 그것들을 다시 불러내어 따지는 일 대신, 자신의 존재와 능력으로 이를 제압하는 태도이며 방법이다.

이 방향으로 가지 않는 한, 남은 길은 너무 좁고 강퍅하다.

배제되고 억압당했던 쪽에서 자연히 한풀이의 마당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인간적이지만 문화적이지는 않다.

소설가 이청준씨의 영원한 주제가 바로 이 갈등 아니던가. '서편제'의 남도소리는 한을 한으로서 풀지 않고 승화시켜 얻은 승리의 예술양식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반세기에 이르는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동족상잔의 고통과 그 폐허로부터 재기한, 슬픔과 기쁨을 함께 안고 있는 역사다.

'재기'만을 생각할 때 거기에는 가슴벅찬 자부심이 충만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절반이 넘는 사반세기 이상 군사독재의 억압 아래에서 숱한 인권유린과 말못할 아픔을 겪어온 민중들의 한이 서린 역사다.

노무현 정부의 출현은 바로 이같은 민중의 승리로 역사적 성격이 특징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승리는 대통령 개인이나 여당만의 승리가 아닌, 배제, 억압, 유린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말하자면 그들의 승리로 이 문제는 이미 '극복'된 것이다.

지난 대선, 총선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정권 다툼 이상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집권한 민중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중은 그저 민중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반만년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되는 한풀이의 정서를 반복하지 않고 싱싱한 역동력과 섬세한 지혜, 거기에 겸손과 온유의 마음씨로 미래를 열어갈 때, 조야(粗野)하다는 비판을 넘어 역사의 참된 승자가 될 수 있으리라.

김주연(문학평론가.숙명여대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