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장승옥 지음/하늘연못 펴냄

'아내란 오미(五味) 구존(具存)이다'란 속담이 있다.

막 결혼한 아내는 마치 꿀처럼 달다.

그러다 살림에 재미가 붙기 시작하면 장아찌처럼 짭짤해지고, 거기서 맛이 더 쇠게 되면 시금털털한 개살구 맛으로 변하게 된다.

그 뒤로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톡톡 쏘는 매운맛이 나기 시작하고, 이 매운맛조차 사라지고 나면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 쓴맛 한 가지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맛에는 이처럼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의 다섯 가지만 있는 게 아닐 터. 고소한 맛과 떫은 맛도 중요한 맛이다.

더 있다.

이성의 살에 살이 맞닿았을 때 느끼는 살맛, 암컷이 수컷과 사귀는 재미는 수맛, 그 반대는 암맛, 시골에서 느끼는 맛은 촌맛, 돈 모으는 재미를 가리키는 돈맛, 매 맞아 아픈 느낌의 매맛, 고통스럽게 느끼는 된맛, 더 고통스러운 죽을 맛 등이 있다.

그러나 맛의 으뜸으로는 단연 감칠맛이다.

음식이 입에 당기는 맛인 감칠맛은 '잊혀지지 않고 늘 마음에 감돌다'란 뜻의 '감치다'에서 나왔다.

'맛깔스럽다'는 감칠맛의 그림씨(형용사)다.

◇ 토박이말 4천793가지 풀이

이처럼 우리 토막이말을 하나둘 배우는 맛도 바로 감칠맛이 아닐까. 그 감칠맛 나는 한글이 빛을 발한 지도 벌써 올해로 558년을 맞았다.

그러나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수많은 맛깔스런 우리말이 뒤안길로 사라지고 잊혀졌다.

이 책은 묻혀 있는 우리말 4천793가지의 어휘와 풀이를 연인과 산책길을 따라가듯 담아내 쏠쏠한 재미를 쏟아내고 있다.

의식주나 자연환경, 세상살이 속에 깃들어 있지만, 잊혀가거나 잘 몰랐던 아름다운 순 우리말의 올바른 쓰임새와 가치를 전하고 있다.

우리네 한평생 삶이 수많은 갈래가 있듯 '길'에도 다양한 길이 있다.

질러가는 '지름길', 에둘러 가는 '에움길', 꼬불꼬불한 논두렁 위로 난 '논틀길', 거칠고 잡풀이 무성한 '푸서릿길', 너비가 좁고 호젓한 '오솔길', 물가나 산길이 휘어서 굽어진 '후밋길', 낮은 산의 밋밋하게 비탈진 기슭의 '자드락길' 등등. 이 숱한 길 위에는 또 다양한 인생을 밟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재주가 많은 '재주아치', 재능이나 지혜가 뛰어난 '슬기주머니', 세파를 겪어 야무진 '대갈마치' '모돌이' '차돌이', 성질이 야무지고 독한 '벼락대신' 등은 모두 능통한 사람이다.

반면 독창성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친사위' '꼭두각시' '망석중이' 등으로 부르고, 역시 주견 없이 남에게 딸려 다니는 사람을 '데림추' '어림쟁이' '코푸렁이'라고 한다.

저만 잘나고 영리한 체하는 '윤똑똑이', 외양만 차리고 실속이 없는 '어정잡이', 못된 짓을 하며 마구 돌아다니는 '발김쟁이', 제멋대로 짤짤거리고 쏘다니는 계집아이인 '뻘때추니', 여러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계명워리' 등은 되지 말아야겠다.

◇ 쓰임새·가치 되찾았으면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 있다.

흔히 물건값을 깎는 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에누리는 장사하는 사람이 물건 값을 더 얹어서 부르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에누리 없다'란 말은 깎거나 보탬이 없다는 뜻이다.

담타기나 덤터기는 남에게 넘겨 씌우거나 넘겨 맡는 걱정거리다.

손님은 단골 손님과 뜨내기 손님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만만하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손님을 '내미손'이라고 한다.

상인의 입장에서 보면 내미손이야말로 담타기를 씌우기에 딱 좋은 손님일 것이다.

술시(戌時;오후 7시~9시)가 되면 술꾼들은 자동적으로 술이 고파서 거리를 나선다.

공교롭게 술시의 '술'자는 '개 술'자다.

술술 잘도 들어가는 술에는 막 배우기 시작하는 '배움술', 멋으로 마시는 '맛술', 맛도 모르고 마시는 '풋술', 함부로 들이키는 '벌술', 한없이 마시는 '소나기술', 화가 난 김에 마시는 '홧술', 안주 없이 마시는 '강술' 등이 있다.

흥정을 도와준 대가로 사주는 '성애술', 가을걷이 뒤 벼로 갚기로 하고 외상으로 마시는 '볏술', 집안 내림으로 잘 마시는 '부줏술'도 있다.

그렇게 마셔 고주망태가 된 상태를 '억병'이라고 한다.

소주를 하루 세병씩 구만천삼백이십사년을 마셔야 억병이 되는 셈이다.

자칫 잘못하면 술 때문에 세상과 작별하게 되는 심오한 '열반주'는 절대 금물이다

저자는 책 제목에 나온 '도사리'(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가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보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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