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범어동 풍경-(18)'터줏대감' 수사관(하)

대구지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입니다.

한겨울 아기를 업은 새댁이 꽁꽁 언 손을 비비며 검찰청사로 찾아왔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남편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러 온 것이지요. 그녀의 사연은 무척 딱한 듯했습니다.

구체적인 사실은 전해지지 않지만, 남편이 없으면 새댁과 아기가 굶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사연이었을 겁니다.

그녀의 하소연은 담당 수사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수사관은 사건 서류를 활활 타는 난롯불에 집어넣었지요. 서류가 타버렸으니 범죄도 없는 것으로 됐겠지요. 요즘 같으면 그 수사관은 당장 형사처벌감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따질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지요. (혹자는 그 주인공이 수사관이 아니라, 나중에 법무장관까지 오른 모 검사라는 얘기도 합니다.

)

어쨌든 수사관이 갖고 있는 권한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지요.

한 고참 수사관의 얘기입니다.

"10여년 전만 해도 수사관들은 기관단체장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운동도 같이 하고 술자리도 종종 함께했지요. 요즘 분위기로는 수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관단체장과 맞대면하기 쉽지 않지요."

20여년 전만 해도 대구지검 수사관의 수는 30명 남짓이었습니다.

무려 150명이 넘는 요즘과는 달리, 희소성 측면에서 큰 힘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때만 해도 검찰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였습니다.

요즘은 거의 없어진 현상이지만, 예전만 해도 명절 때가 되면 선물행렬이 줄을 잇곤 했습니다.

검사에게 가는 것도 있었겠지만 평소 알고 지냈거나, 인사할 필요가 있는 수사관들에게 가는 선물이 상당부분이었습니다.

선물들을 가득 모아 어려운 이웃이나 기관에 보내는 수사관도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는 '권한을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실제 꽤 많은 말썽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잘못을 해도 옷만 벗으면 대개 형사처벌은 면해주는 것이 관행이었으니 좋은(?) 시절을 보낸 셈이죠. 요즘은 잘못하면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낮술을 마셔도 감찰 대상이 되는 시절이니까요.

"이제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곳이 바로 검찰입니다.

검사나 수사관 모두 예전 기분을 갖고는 생활을 할 수 없지요. 신세대 수사관은 술자리도 싫어합니다.

제대로 돼가는 것이지요."

기자에게 굳이 옛 얘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를 묻는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흘러간 과거를 곱씹어봐야 뭘 하겠습니까만은 과거가 현재의 거울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냥 재미있는 글로만 봐주기 바랍니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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