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벨문학상 임레 케르테스의 '청산'

"과거청산은 새로운 시작" 인간의 가치에 대한 물음

나라를 팔아먹은 조상들 덕택에 지금껏 풍요롭게 살고 있는 친일파의 자손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바쳐 싸워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여전히 궁핍한 삶….

과거사 청산문제로 아직도 갈등이 그치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에 노벨문학상(2002년) 수상작가 임레 케르테스(76)의 소설 '청산'(다른우리 펴냄)은 진정한 청산의 의미를 되묻는다.

케르테스는 데뷔작 '운명'을 통해 우리와 친숙해진 작가. 그의 작품 세계는 '운명' 4부작에 집약돼 있다.

2002년 12월 '운명'을 시작으로, 2003년 5월 '좌절', 같은 해 4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 이어 마지막 완결편인 '청산'을 내놓았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청산'은 소설 제목 그대로 청산(淸算)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상황에서 지식인의 수모를 소재로 해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 케세뤼는 홀로코스트의 상흔에 못 이겨 존재의 청산(자살)을 단행했지만 결국 도플갱어(분신 또는 환영)인 또 다른 주인공을 살게 함으로써 과거를 청산하고픈 욕망과 삶에 대한 의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는 '청산'이란 쇼펜하우어적 염세론의 찬미가 아니라, 강한 삶의 의욕만이 '존재의 청산'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인 '청산'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청산으로 희망과 같은 의미로 차용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케르테스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어야 했던 참혹한 경험들이 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수용소 경험이 이후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하다.

사회폭력에 대항한 개인의 실존을 옹호하는 글쓰기. 그 첫 작품이 1975년 마흔여섯의 늦은 나이에 출간한 '운명'이었다.

10여 년에 걸쳐 쓴 이 소설을 통해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비인간적인 만행을 절절한 언어로 생생히 담아냈다.

한 개인이 야만적인 폭력 아래에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생존하고 사고할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 것이다.

케르테스는 사회적 힘과 폭력이 개인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파헤쳐 왔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유럽의 통상적인 역사 바깥에서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근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빠질 수밖에 없는 타락의 극한적 모습으로 보았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재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결국 아우슈비츠는 겪은 자들만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아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 케르테스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메시지이다.

그동안 가벼운 흥미위주의 소설에 싫증난 독자라면 '청산'을 통해 오랜만에 인간의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 볼 만하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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