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양심을 속이지 않고 한평생 '인간'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3일 국가보훈처가 추서한 독립유공자(대통령 표창)로 뽑힌 조영진(84·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옹은 '상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다'며 거듭 말을 아꼈다.
경북 문경이 고향인 조 옹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지난 1939년 9월 이른바 '대구사범학생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부 재학생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족의식이 담긴 서적을 돌려보는 등 치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일제 탄압을 받은 것.
"요즘 말로 하면 서클활동인 셈이죠. 100명 중 90명이 조선인 학생들이었는데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최남선의 '고사통' 등이 베스트셀러였어요. 일제의 눈을 피해 자취방에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거나 전단을 등사해 뿌리고는 했어요."
서울, 평양과 함께 사범학교가 있는 대구는 자연스레 학생 독립운동의 본산이 됐다. 그는 김영기라는 조선인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했다.
"조선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늘 애국을 강조하셨어요. 오죽하면 애국시조 100수를 학생들에게 꼭 외우도록 했겠어요. 지금도 외우고 있어요."
사범학교 11기인 조 옹은 1939년 9월 3일 오전 학교강당에서 검도수업을 받던 중 형사들에게 연행됐다. 주동자격인 8기 등 선배들과 일부 교사들은 이미 여름방학 중에 검거된 터였다. 형사들은 신천동에 있던 그의 자취집을 뒤져 일기장과 책을 압수하고 다음 날 조 옹을 포승줄에 묶어 대전형무소로 이송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까지 3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형무소를 나왔지만 이미 학교에서 제적된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그해 겨울 중국 베이징으로 밀항, 북경에서 '청년회', '영어강습회'를 조직, 조선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선어와 역사,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1946년 귀국한 뒤 47년부터 경북여고, 대륜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경북대학 문리대 강사로도 몸을 담았다.
그러나 되찾은 조국에서도 조 옹은 고초를 겪었다. 4·19 이듬해인 1961년 교원노조운동을 벌인 혐의로 학교에서 파면된 것. 일제 치하에서는 불순분자로 몰리더니 해방된 조국에서는 용공분자로 몰린 셈이다.
가까스로 서울로 자리를 옮겨 몇몇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이어갔고 최근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요양 중이다. 조 옹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독립운동사 편찬사업에 말년의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사회주의이건 민족주의이건 어느 계열·주의에 속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양심이 가리키는 바를 향한 소신과 열정을 가졌으면 합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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