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지하의 사상기행]-(3)한울님의 부적 '태극궁궁'

앞의 글을 이어 세번째 드러남의 예견을 계속 이어가도록 한다.

셋.

혼돈적 질서의 과학은 생명학·우주생명학의 담론에 의해 촉발되고 그 담론은 '극에 이른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 즉 '혼돈의 질서'라는 기준에 의해 이끌린다면, 그 기준은 결국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점인 오늘에서 인류 전체와 생명·비생명, 인격·비인격을 모두 포함한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원형을 동반하는 기준일 것이다.

동학에 바로 그 원형이 있는가? 그렇다. 있다. 그것도 살아 있다. 1860년 경주 용담에서 최수운이 받은 계시의 첫 번째가 바로 그 원형에 해당하는 한울님의 부적(靈符)이다.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고 또 그 모양은 궁궁(弓弓)이니 '태극궁궁'이 곧 후천개벽 시대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원형인 것이다. '태극궁궁'은 무엇인가? 태극은 선천시대의 생명학·우주생명학인 주역의 질서 정연한 코스몰로지의 상징이고 궁궁은 후천시대의 혼돈한 삶의 비결인 '정감록'의 암호다. 후천개벽은 후천에 의한 선천의 섬멸적 파괴가 아니라 후천을 중심으로 해체·재구성되는 선천과 후천 사이의 공존과 균형, 후천 쪽으로 약간 더 중심이 기우는(時中원리) 역철학, 음양원리의 핵심이다. '기우뚱한 균형'인 것이다.

따라서 '태극궁궁'은 이미 19세기에 세계화한 후천개벽 시대를 살아갈 민중의 새 삶과 새 세계의 새로운 원형이 되는 것이다.

넷.

20년 전 강원도 원주에서 시작된 생명운동, 유기농생협, 반공해 환경운동, 생태생명문화운동 등이 모두 동학사상, 특히 그 중에서도 최해월 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조직적 실천을 토대로 했다. 원주에서 비롯된 생명운동은 이후 계속적으로 확충되면서 종교, 과학, 시민, 빈민, 예술, 그 중에서도 유독 시문학에서 뚜렷한 성장을 보이며 오늘에는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생명과 평화의 새 문명을 건설하는 큰 문화 운동으로까지 비약하고 있다. 이것은 '세번째 드러남'과 연관이 없는 것인가?

다섯.

오늘날 전 인류와 함께 동아시아, 특히 한민족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롭고 평화적인 문화대혁명이고 동아시아 대문예 부흥운동으로서 정치와 경제에 앞서 문화적인 대전환이다. 동학은 바로 이 대전환의 기점(起點)이다. 우리에게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문화혁명으로, 후천개벽은 신화가 아니라 문화과학으로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즉 '상상력'과 '미학' 방면의 대규모 사건이 된 것이다.

여섯.

동학은 기초예술과 문화산업 사이에, 문화사업의 '경제력(상품가치)과 질(미학적 품질)'사이의 '긴장'에 대한 웅숭깊은 대답으로서 검토되기 시작한다. 동학은 붉은 악마, 촛불에서 한류(韓流)열풍에 이르는 눈부신 비약을 설명하고 다시금 그 개벽적 에너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

김용옥의 '도올심득동경대전'역시 신세대 속에서 동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에 기여했다고 한다. '세번째 드러남'이 붉은 악마, 촛불과 한류에 연계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전 인구의 79%를 차지하는 10대, 20대, 30대 초반 신세대 남녀의 이른바 붉은 악마 현상, 즉 '엇박', '치우', '태극기' 문화의 새로운 비약, 새로운 차원 변화의 근거이자 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세번째 드러남'의 주체 문제다. 여기엔 필연코 '자재연원(自在淵源)', 즉 '가르침의 샘물이 내 안에 있다', 또는 '자기 가르침을 자기가 배운다'는 동학의 진리대로 붉은 악마 세대 자신이 자신들이 내세우고 약동했던 '엇박', '치우', '태극기'의 문화적 원형, 역사적 기준, 철학적 담론을 토론하고 공부해야만 한다.

'세번째 드러남'의 주체 문제는 바로 교육혁명에 있는 것이다. 이것 없이 우리나라의 교육,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여덟.

'혼돈의 질서', '지극한 기운', '궁궁태극', '모심과 살림', '생명학·우주생명학' 등 모든 사상 안에는 세 가지 원리가 숨어 있다. 민중성, 여성성, 영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세번째 드러남'의 필수조건이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성, 모성, 살림의 능력, 모심의 능력은 으뜸가는 원칙이요, 그 중심이다. 새 삶과 새 세계, 새 문화와 새 문명 창조의 주체 중의 주체는 바로 여성이요, 어머니요, 할머니인 것이니, '세번째 드러남은'은 어쩌면 원시와 고대를 관통했던 전통 신화의 창조적 회복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다름아닌 '궁궁(弓弓)'인 것이다. 그래서 '궁궁태극'이라고 말한다.

아홉.

19세기에 식별되지 않았던 지구와 주변 우주의 후천개벽적 사태들이 이제는 거의 일상화되고 있다. 인간의 내면적 황폐와 불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에 따른 빈·부국 사이의 격차 심화와 시장 불안, 전 지구 생태계의 오염, 테러와 전쟁 이외에 온난화, 기상이변, 지각의 대변동, 북극 해체, 빙산과 그린랜드의 해빙, 이산화탄소의 과잉배출, 황사, 남반구 해수면 상승과 장기적 폭염, 저지대 곡창의 침수와 식량난의 도래, 지구 자전축 및 대륙·해양 지각판들의 충돌, '쓰나미'에 이은 폭설, 혹한, 먹이사슬 파괴 등은 문자 그대로 후천개벽이다. 개벽의 인식과 대응으로서 '세번째 드러남'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닌 필연적 대세인듯 하다.

열.

집단과 종(種)선행론으로 기울었던 다윈 이후 자연선택의 진화론이 타파되고 자기 선택과 자유의 진화론,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이 상승하면서 집단주의, 공산주위, 파시즘, 공동체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개체, 개별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는 분권(分權)적 융합, 퓨전'의 '내부공생(內部共生)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상 및 역사인 '풍류'와 '화백'과 '신시' 등에서 관철 되었던 '호혜(互惠)'와 기존의 '교환'시장이 이중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재분배(再分配)'를 실현하는 '품앗이'와 '계(契)'의 전통, 그 '개체적 융합'의 전통을 새롭게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학의 '포(包)'와 '접(接)', '육임제(六壬制)'등은 모두 이 같은 고대 전통의 부활이며 실천이었다. 사회경제사적으로, 경제인류학적으로 신시는 곧 호혜요, 계이며 그 정치적 관철양식이 화백의 직접민주주의, 전원일치제이고 거기에 따르는 생명과 평화의 문화, 생명학·우주생명학이 곧 풍류였다. 그 풍류의 근대적 부흥이 동학이었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동아시아에서 이것이야말로 동학의 참다운 '세번째 드러남'이 아니겠는가!

열하나.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인 동학은 한발 더 나아가 창조적 진화론을 관철했다. 왜 그러한가?

창조론과 진화론 결합의 조건은 '신(神)의 규정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을 모색하는 과학철학 및 과학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규정과 신의 본질 설정으로 가득 찬 기독교(모슬렘 역시 마찬가지)신학 텍스트로부터 유럽신학과 철학, 과학이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바깥으로 추방했던 '무(無)', '공(空)', '허(虛)', '비존재', '혼돈', '정열', '무의미' 등을 다시 끌어들여 타협하고 있다. 신이 공허이든가, 배고픈 영혼이나 굶주린 비움이 아니라면, 혼돈이면서 탈혼돈인 모순이 아니라면 창조와 진화는 서로 만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복수하는 자', '저주하는 자', '사랑하는 자' 등등 무수한 명함을 가진, 그야말로 존재 그 자체인 신은 결코 생성도 창조도 혼돈적 질서에도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라! 최수운은 두 번째의 본주문 해설에서 가장 중요한 '하늘', 즉'천(天)'을 한마디 해석도 없이 '모심'에서 '님'으로 그냥 넘어가고 만다. '신'과 '하늘'은 그야말로 무요, 공이요, 허이며 자유요, 빈터요, 가능성이요, 혼돈이며, 비존재이니 그러므로 도리어 생성이요, 변화요, 과정인 것이다. 바로 '없음'이니 곧 '살아 있음'이다.

이 모든 '세번째 드러남'의 특징들을 미학 쪽에서 정리해보자. 그것은 곧 '흥비(興比)의 미학'이니 흥의 창조력을 중심으로 교술과 비유를 배합해 '비판적 감동(탈춤, 판소리, 진경산수, 속화, 민화, 민요의 산조, 시나위, 허튼소리, 허튼 춤 등 한류의 전통적 원리)'에로 이끄는 미학 원리다. '세번째 드러남'은 다분히 미학의 얼굴을 하고 올 것이다. 한(恨)을 동반한 흥(興)의 미학, 한을 흰 그늘로 극복하고 흥이 중심이 된, 즉 흥비(興比)의 미학. 왜냐하면 문화, 감성, 상상력, 새 세대가 거대한 차원변화, 후천개벽의 특징적 주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한류다. '한류'의 저 앞날에 드디어 '세번째 드러남'인 '삼은삼현'의 대문예부흥,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아마도 남한의 '한(恨)을 밑에 거느린 흥'의 미학과 북한의 '흥취(興趣)론'이 만나는 민족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만사지'요, 그것이 생명의 차원변화 즉, '지화(至化)', '만 년의 진화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는' 대개벽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 하나의 고구려를, 새 세계를 잉태하고 출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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