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아침 햇살이 골짜기를 깨운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는 산길이 깨끗하다

길가의 키 큰 상수리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줄무늬 다람쥐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살고 있다니!

이진흥 '산책길에서'

물질문명은 인간 삶의 뿌리인 정신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 그래서 삶의 가치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싸고, 잘 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마침내 우리 몸은 정신을 담는 집이 아니라 정신이 휘발해 버린 기이한 존재가 되었다.

간혹 상실한 정신성을 되찾는 순간이 있다. 자연과 교감할 때다. 시인은 산책길에서 '아침 햇살이 골짜기를 깨우는' 것을 본다. 자연과 교감하는 순간이다. 바로 몸속에 숨어 있는 정신성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자연은 조화의 세계다. 큰 것과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어울려 햇살 아래 각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키 큰 상수리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줄무늬 다람쥐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곳이 자연의 세계다. 어울리면서 서로 다르고, 다르면서 어울리는 세계다. 이런 자연과 교감할 때 인간도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럴 때 우리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살고 있'는 축복받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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