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자 농촌체험] (19)영양 두메 송하마을

"빨갛게 잘 익은 놈만 골라 따야 됩니다."

고추밭 주인 손병극(59) 씨의 표정이 썩 밝지않다. 도시에서 온 코흘리개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행여 망치지나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올해는 탄저병으로 가뜩이나 수확이 줄었는데.....

안타까운 농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랑을 헤집고 뛰어다니는 꼬마들은 마냥 신이 났다. 하기야 아파트 숲에서 자란 도시아이들이 이 탐스런 '고추나무'를 언제 구경이나 해봤을까!

"아저씨, 이거 제가 다 땄어요. 그런데 어떤 건 아직 파랗네요." "괜찮아. 며칠 놔두면 다 익어." 묵직해진 포대자루를 짊어지는 손 씨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번진다.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 송하계곡은 한여름 찜통더위를 잊기엔 그만이다. 반두 하나씩 손에 든 체험객들은 피라미떼의 군무(群舞)에 이끌려 물 속으로 첨벙첨벙. 하지만 초보들에게 쉽사리 잡힐 녀석들이 아니다. 건져올린 반두에는 자갈만 한 움큼이다. "그물코가 너무 큰 거 아냐?"

보다못한 손승호(47) 마을사무장을 비롯한 주민들이 바지를 걷어붙이고 나선다. "여기 모두 모이소. 빠져나갈 틈 없게 바짝 붙어서 있으소."

"이야아, 이야아" 함성과 함께 계곡 아래쪽으로 몰이가 시작되고 이내 탄성이 쏟아진다. "와! 진짜 고기 많네. 여긴 네 마리, 저긴 다섯 마리나 잡혔네. 이건 정말 물 반 고기 반이네요." 20cm짜리 '대물' 꺽지를 건진 이상길(36) 씨의 말에 주민들이 농을 건넨다. "아이제. 고기가 물보다 조금 더 많다."

폐교된 송하초교 운동장에 차려진 야외식당은 잔칫집 분위기.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된장에 찍어먹는 고추는 달기만 하고 매운탕은 밥도둑이다.

"올해 처음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더 즐거워합니다. 자식 손자라 해도 일년에 몇 번 못보는데 아이들이 이렇게 와 떠들석하니 사람 사는 것 같습니다." 권영도 마을 대표의 기분 좋은 너털웃음이 식욕을 돋군다.

영양은 반딧불이의 고장이다. 이삼십년 전만 해도 전국 어디에서나 반딧불이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청정환경의 상징이 돼 버린 탓이다. 하지만 요즘은 때가 아니다. 마을에서 40분을 달려 찾아간 '영양 반딧불이 생태학교'에도 반딧불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늦반딧불이는 8월 하순이 되어서야 나타납니다. 오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반딧불이생태체험때 오시면 잘 볼 수 있지요." 김경호(29) 학예연구사의 설명에 모두들 실망하는 기색. 어쩌랴! 만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인 것을.

아쉬움은 천문대에서 '감동'으로 바뀐다. "저기 보이는 건 카시오페이아입니다. 이쪽에 밝게 빛나는 건 북두칠성이죠." 모든 조명을 끈 뒤 새까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를 콕콕 찍는 최지현(25) 학예연구사의 '레이저 포인트 쇼'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을 떼지 못한다. 딸 채윤이와 함께 온 임극수(44) 씨는 "다른 천문대에도 몇 번 가봤지만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기는 처음"이라며 자리를 뜰 생각은 않는다.

이튿날 아침. 민박집 할머니와 푸짐한 밥상보다 더 맛있는, 살아가는 이야기로 가슴을 채운 체험객들이 운동장으로 하나 둘 모여든다. 이미 운동장 그늘 아래에는 장승깎기 체험이 준비 완료. 손병극 씨의 지도 아래 끌과 나무망치를 잡고 작품 만들기에 도전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다치지않은 것만 해도 다행? 1시간 여를 씨름한 끝에 그럴 듯한 장승 하나를 완성,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마을 회관 앞에 세운다.

"저희 집에 항상 행복만 가득 하게 해주세요." "돈 많이 벌고 아이들 공부 잘 하게 해주세요." "아빠가 장난감 많이 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가 이문열 씨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인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이 있는 석보면 두들문화마을을 둘러보고 대구로 돌아오는 길, 체험객들의 옆자리에는 벌써 행복이 찾아와 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영양·김경돈기자 kd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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