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수학] ⑫목월의 시심을 울린 가난

'萬述(만술)아비의 축문' -박목월-

아베요 아베요/내 눈이 티눈인 걸

아베도 알지러요./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리고개/아베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손이믄/아베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下略)

가난한 자식이 부모님 제상에 변변한 제물 하나도 올리지 못한 한을 노래한 시다. 나도 경주가 고향이고 나이는 목월선생 보다 10년 年下(연하)이다. 同鄕人(동향인)이라는 地緣(지연)을 떠나, 선생은 나에게 공경과 思慕(사모)의 대상이다.

소년 시절, 왠지 모르게 목월 선생 얼굴이라도 엿보려 경주 동부금융조합 창구를 들랑거린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인생 80을 바라보고 있으니 세월의 빠름을 새삼 느낀다. 목월선생의 향리 牟梁(모량)과 나의 경주 舊家(구가)와는 6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다.

시골역의 정서가 그러하듯 '모량역' 역시 가난하고 쓸쓸한 외딴 마을의 인상을 준다. 타고 내리는 사람도 드물고, 야간열차로 통과하다 마주치는 역 구내 불빛도 어두침침하다.

앞에 실은 시의 처음 발표 시기는 1967년 12월이다. 詩文(시문)을 감상하거나 이러쿵저러쿵 글을 부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안목도 어둡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컨데 여기서 詩作(시작)의 배경이 될 수 있는 대강의 統計的 數値(통계적수치)라도 되새겨 보는 것이 詩思(시사)의 軌跡(궤적)을 밟아 보는데 보탬이 될까 싶어 나름대로 '작가 연보'를 길잡이 삼아 당시 우리 국민들이 먹고, 입고, 쓰고 한 살림살이 등의 경제적 형편을 엿볼 수 있는 국민소득 등을 알아보았다.

목월 시가 발표된 1967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42달러였으며 이는 같은 해 북한 1인당 소득 180달러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현상은 1969년부터 뒤바뀌어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목월의 콩트 '도토리'가 당선된 1936년, 1인당 국민소득은 25달러였다.

또한 해마다 잇따르는 절량농가의 발생상황을 보면 1930년 목월이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 할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전체농가의 48.8%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목월의 생활 터전이었던 牟梁里(모량리)를 비롯한 그 주변 농업지대는 水利不安全畓(수리불안전답)이 많은 旱乾(한건)한 곳이라, 그 들판 모내기가 끝나야 경주시 전역의 水稻移秧(수도이앙)이 마무리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리조건이 열악한 농촌이었다.

이상의 사례들과 함께 이 詩(시)를 되새기면 가난 속에 찌들었던 보릿고개의 삶이 눈에 선하다. 아마 60, 70대 이상의 世代(세대)일수록 感懷(감회)가 더욱 깊으리라. 윤사월 보릿고개, 간고등어 한 손 못 올리고, 등잔불도 없는 祭床(제상)에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잡수시고 가시라는 한은, 목월 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가난했던 반만년 역사의 소산이었다.

김수학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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