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이정환 作 복사꽃 마을 어귀

복사꽃 마을 어귀

이정환

복사꽃 마을 어귀

하얀 배꽃 한 그루

우뚝하니 지키고 서서

복사꽃들 돌봅니다

홀로 된

어머니처럼

복사꽃들 돌봅니다

그끄제 아침, 사무실 책상머리에 놓여 있던 한 권의 책 이야깁니다. 겉장이 온통 다홍인 걸로 보아 긴 겨울 허리를 질러온 게 분명한데요. 이 마을에 사는 벗이 산책 길에 두고 갔나 봅니다. 세속에 끼친 또 한 권의 시름을 벗은 이렇게 파젯날 반기하듯 도르려는 게지요.

다홍에 눈을 뺏겼다 고쳐 보니 다홍만이 아닙니다. 연두와 노랑, 하얀 꽃송이도 곁들였습니다. 눈에 익은 색감이 별나무(李奎木) 화백의 그림입니다. 속장을 열자 정겹고 살가운 시들이 가득합니다. 꽃밭인가 하면 별밭이고, 별밭인가 하면 풀밭인데요. 새와 나무, 흙과 바람, 냇물과 까치집, 게다가 숱한 아이들의 눈빛과 웃음소리까지 오롯합니다.

그 책('길도 잠잔단다'·만인사)에서 복사꽃들을 돌보는 배꽃나무의 시를 골라 읽습니다. 꽃은 지천이고, 봄은 한창이군요. 눈자위가 붉다 못해 눈물까지 그렁, 고일 듯한 것은 저만치 어머니가 서 계신 까닭입니다. 오래 전

홀로 된 어머니가 무명 고름을 말아 쥔 채 서 계신 까닭입니다.

봄날에, 그런 복사꽃 마을 어귀에 서면 누구나 말문이 막힙니다. 입보다 먼저 눈으로 말을 하기 때문이지요. 한 편의 시 속에 환한 복사꽃 배꽃 다 따 먹고 지레 겨운 봄입니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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