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으로 버스가 향했다. 김제평야 넓은 들판이 푸른 벼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언덕을 몇 개 넘자 머리 위로 서해안 고속국도가 지나갔다. 동진강 휴게소가 왼편에 보이면서 부안이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나타났다. 갑자기 바다 비린내가 코를 스쳤다. 큰 다리(동진대교) 건너편에는 검은 갯벌이 펼쳐 있었다. 여기가 부안이로구나. 여기가 신석정의 고장이로구나. 바다가 속삭이는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가 베토벤처럼 귀가 먹은 것 같이 부안이라는 이름에 취해 내 귀가 먹고 있었다.
바다여 /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 해안선(海岸線)의 바위는 /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 지구(地球)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 참다못해 /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 저 언덕에서 /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 너를 웃고 있지 않니? // 동백꽃이 / 자꾸만 웃어대는 / 고 빨간 입술이 / 예뻐 죽겠다. (신석정의 전문)
부안읍을 거의 지날 무렵 어느 슈퍼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신석정 생가 가는 길이 어딘가요?' '선생님 생가 말인가요? 계속 나가시면 고창 가는 길이 나와요. 계속 가시면 줄포 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에서 좌회전하시면 고창이고요, 우회전하면 곰소 가는 길인데 곰소 가는 길로 가다 보면 길 가에 선생님 생가가 있어요.' 자세한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으면서 신석정 시인에 대한 부안 사람들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의 소개에는 생가가 부안읍내에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아주머니는 분명히 맞다고 했다.
어쨌든 고창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아무래도 인터넷의 기록이 마음에 남았다. 고창 가는 길도 물어볼 요량으로 식당에 들러 다시 신석정 생가를 물었다. 사장님은 부안읍 전체 관광지도까지 주시면서 부안 자랑을 시작했다. '부안은 정말 좋은 곳이지요. 산과 바다가 함께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신석정 시인님의 생가는 부안읍내에 있지요. 김제 쪽에서 오셨다면 지나오는 길목에 있었을 텐데요.' '어떤 아주머니께서 줄포에서 곰소 가는 길목에 있다고 하던데요?' '아마 착각하셨던 것 같네요. 거기는 반계 유형원 선생의 생가가 있어요. 신석정 시인의 생가는 부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요.' 주인 아저씨의 부안 자랑은 계속되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다시 뒤로 돌렸다. 시내를 벗어날 무렵 수퍼에서 다시 신석정 생가를 물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생가가 있었다. 동진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생가 표지판이 작은 모습으로 서 있었고 생가는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생가 들어가는 길목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도 멋진 모습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쉼터에 앉아 음료수와 간식을 먹었다. 전북 기념물 84호, 안내판에는 신석정이 26세 때 이 집을 직접 지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청구원(靑丘園)'. 집은 아담했다. 생가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스러움은 덜했으나 청구원 주위를 둘러싼 풍경은 자연스러웠다. 방문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전부였다. 넓은 마당을 가득 메운 콩, 들깨 주위에는 하얀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인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마당 오른편에 자리 잡은 오동나무도 눈에 밟혔다. 깨끗한 건물을 제외한다면 고향의 모습 그대로였다. 방안은 깨끗한 벽지와 함께 전형적인 신석정의 사진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하고 나무처럼 두 팔을 드러내고 사는 것에 만족했던 신석정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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