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영섭의 올 뎃 시네마]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그렇다. 왕가위의 세계에선 먹는 게 문제다. 애인에게 차이면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고(중경삼림), 남의 아내에게 마음을 앗긴 남자는 홀로 남겨져 천천히 만두를 씹어 삼킨다. (화양연화). 먹을 것, 입을 것 모두가 왕가위의 세계에선 단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아니라, 그건 때론 상처를 먹어 버리기도 하고, 그리움을 토하기도 하며, 모든 사회적 억압을 감내해야하는 삶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파이는 너무 달다. 여 주인공 엘리자베스(노라 존스)에게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는 아무도 그 진가를 알아 보지 못하고 늘 한구석에 덩그랗게 놓여진 블루베리 파이를 내 놓는다. 그게 뭐 남자 친구에게 차인 엘리자베스에 대한 은유이자 제레미의 마음이 담긴 디저트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일.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간 왕가위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스텝 프린팅이나 감각적 이미지, 귀에 감기는 음악들이 죄다 장식이 된다. 그리움, 슬픔, 애절함, 이런 정서들이 모두 기화되고, 찐득한 이미지의 향연만이 마음에 달라 붙어 버린다.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무 말 없이 뉴욕을 떠난다. 네바다에서 웨이트리스를 하며, 밤이 되면 술에 취해 사는 경찰과 그 아내의 비극적 사랑을 목격하지만 그들의 파국에 속수무책이다. 라스베가스에서 만난 레슬리(나탈리 포트먼)는 카드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도박사. 그녀에게 돈을 꿔준 엘리자베스는 돈 대신 차를 받고 레슬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고향을 등진 왕가위 감독은 할리우드 뒷 골목에서 길을 잃어 버린 듯 보인다. 미로같은 홍콩의 골목길과 자그만 새장 같은 홍콩의 카페에서는 비록 양조위가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주인공들은 흐르는 강 같은 홍콩의 인물군상들과 도도히 동떨어져 자기만의 세계에 유폐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영화가 데뷔작인 가수 노라 존스나 주드로, 레이첼 와이즈의 얼굴에서는 장만옥이, 양조위가, 장국영이 내뿜던 그 허무하고도 고독한 심연의 눈길을 찾을 수가 없다. 스텝 프린팅 같은 화려한 포장이나 까페 창안과 밖을 넘나드는 다리우스 콘지의 기막힌 촬영술이 뉴욕을, 멤피스를, 라스베가스를 홍콩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만큼 왕가위의 공간과, 형식과 영혼은 홍콩에,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술에 깊게 뿌리 박혀져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게다가 왕가위 감독은 시간의 마술사 아니던가. '나는 너를 잊겠지만, 너는 나와 함께한 이 1분을 잊지 못할 거라'는 아비정전의 대사. 그리고 장국영을 만날 때만 다시 살아나는 내면의 시간을 흑백과 칼라로 표현했던 '해피 투게더'. 거의 전작 모두에서 왕가위 감독은 사랑 때문에 멈추어지고, 헤어짐 때문에 기억의 수로를 해매는 주인공들의 주관적 시간을 몽환적으로 잡아낸 시간의 마술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러한 시간의 주관적 탐구대신 감독은 로드 무비와 성장영화의 공식을 통해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포착하려 든다. 결국 자신의 필모에서 거의 유일한 해피 엔딩에다, 자신의 필모에서 거의 유일한 로드 무비인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어떤 새로운 고민과 사색을 찾아내기 힘들다. 그만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수취인 불명에다 국적불명이다.

과연 왕가위의 영화에 늘상 최고의 찬사와 홍콩의 역사적 주석을 갖다 붙이던 나는 어떡해야 할지. 또한 언제나 영원한 왕가위의 수호천사로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조차 '대중적인 실험영화'라고까지 칭했던 정성일 선생이 과연 뭐라 평하실지…. 그간 왕가위 감독에게 퍼부었던 상찬이 지독히 머쓱해지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밤은 정말이지 깊고 깜깜하다.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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