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은 한족의 문화가 가장 우수하다는 관념이다. 중국의 한족들은 황하문명이 발전할 무렵 문화수준이 떨어지는 주변 이민족을 서융, 북적, 남만, 동이라 칭하며 천시했다. 이민족에 대한 이런 명칭은 특정 지역의 특정 이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족을 제외한 동서남북의 이민족 모두를 일컫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중화사상이 배타적이라기보다 포용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민족일지라도 중화문화를 받아들이면 중화의 일원으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한 예로 당나라는 고구려의 왕족과 장수를 신하로 삼기도 했다. 이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유화정책이 아니라 열린 마음에서 기인했다고 봐야 한다. 또 양귀비 이야기로 유명한 안녹산 장군은 아랍계통의 색목인이었다. 중화문명 초기 오늘날 허난성 루오양(洛陽) 주변의 소수민족에 불과했던 한족이 전 중국영토로 확대된 것은 이런 포용성 덕분이었다.
물론 한족이 이처럼 넓게 뿌리내린 것이 '중화사상' 덕분만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포용성이 '강한 중국'의 근간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소수의 인구로 중국대륙을 정복한 후 한족 문화를 수용하고 피지배층인 한족을 만주족과 동등하게 대했다. 그 결과 청나라는 267년간 존속하며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반대로 중국대륙을 정복한 몽고족은 한족을 정치무대에서 철저히 배격했고 오로지 노예적 예속관계에 묶어두려고 했다가 오래지 않아 무너졌다.(물론 몽고는 자신들의 초원을 지켰지만 현재 만주족은 신분증에만 표시가 남아 있을 뿐 그들만의 영토가 따로 없다.)
우리나라에는 100만명이 넘는 외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서양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은 일상적 풍경이다.
이 책 '세계시민주의'는 우리는 다른 지역,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대화가 불가피하며, 나아가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국적과 민족, 종교의 경계를 초월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자는 것이다.
지은이 애피아는 우리가 이방인 혹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볼 때 어떤 고정관념과 오류의 틀을 갖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만날 때 마주치는 문화에 대한 인식을 '조각난 거울'에 비유한다. 할례나 동성연애, 낙태 등은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며 여기에 '나의 도덕적 진리'를 잣대로 갖다댈 경우 '조각난 거울'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오히려 상대주의를 위험하다고 본다. 일방적 상대주의는 '내가 있는 곳에선 내가 옳고, 네가 있는 곳에선 네가 옳다'는 뻔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윤리와 양심 등 인간 본성의 문제에 관한 한 상대주의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특히 세계화가 각 지역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모든 것을 동질화해 버린다는 비판에 반박한다. 농촌 고유문화를 지키기 위해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농촌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고,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지역적 정체성에 가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오늘날 흔히 '지역 문화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에도 비판적이다. 본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본래 생활방식이 과연 본래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이라고 여기는 것도 한때는 혁신이었고, 혁신과 변화를 거치면서 형성됐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한다는 것이다.
애피아는 역사적으로 볼 때도 사람들은 정착을 위해 동질적 문화와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몽골과 무굴 제국, 아프리카에 정착한 반투족, 불교와 기독교의 전파 등은 역사적으로 대규모 혼성이었고, 혼성은 오늘날 문화의 과정이었거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애피아는 문화와 예술의 소유권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다. 그는 세계문화는 공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문화유산은 상당수가 현대 국가체제가 성립하기 전에 만든 것이다. 설령 그 지역에 조상들의 피를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명확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다만 특정한 영토에서 발견되었고 누구도 현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음으로 현재 그 지역 정부가 그 유물을 보존할 특별한 책임을 갖는 것이 합당하다." 문화유산 역시 '민족'의 관점이 아닌 '인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시민주의는 이방인 즉, 모든 인간에 대해 의무를 가지라고 말한다.
애피아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품위를 가지고 살기 위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기본적인 욕구들, 즉 건강이나 음식, 집, 교육 등이 있다. 또 아이를 갖거나 거주지를 이동하거나 생각을 표현하거나 하는 선택권들도 마땅히 가져야 하며, 반대로 불필요한 고통이나 신체 훼손 등을 강제당해서는 안 된다"며 "이런 기본 욕구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기본적인 의무로 감수해왔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나 민족, 지역, 인종을 넘어서자는 세계시민주의는 지금까지 반(反)애국주의·반민족주의의 '혐의'를 받아왔다. 이런 문제들이 불거질 때마다 인류에 대한 애정과 애국·애족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애피아는 양자택일 논쟁으로 이 문제에 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국가나 민족의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애피아는 국가나 민족, 사회에 앞서 개인의 이성과 윤리에 호소한다.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는 모든 시민이 하나의 지역 공동체(나라 혹은 국가)에 속해야 한다는 전통적 관점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세계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 공동체를 인정하되 세계 시민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방인은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사는 존재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일상적 실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의 일원이자 개인으로서 우리가 이방인에게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 근거는 우리 가슴속에 자리잡은 이성, 원칙, 양심이다.
지은이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국가나 민족 혹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양심과 원칙'을 바탕으로 판단하자고 말한다. 속도가 공간과 거리를 점점 좁혀 가는 요즘이다. 딱딱하지만 음미해 볼 만한 책이다. 300쪽, 1만6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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