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와서 악착같이 소유하려는 것이 범인(凡人)이다.
무소유.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초월 성인(聖人)의 몫이다. 지난해 작고한 동화작가 권정생. 무소유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는 평생을 아파하고, 평생을 외롭고, 평생을 힘들게 살다 간 '성인'이다.
그러나 그는 무소유로 일관했지만, 가슴에는 생명에 대한 한없이 큰 사랑을 품고 살았다. 새벽 4시. 종지기인 그는 서리가 하얗게 앉은 차가운 종 줄을 맨 손으로 잡고 새벽종을 쳤다.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들이 듣고, 강아지며 벌레며 길 가의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겠느냐?
겨울이면 생쥐가 그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성긴 벽마다 황소바람이 들어왔지만, 그래도 이불 속에는 체온이 있었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생쥐를 기다렸다. 이 얼마나 숭고한 희생이고, 사랑인가.
민중판화작가 이철수(54)는 젊은 무명작가 시절부터 안동 일직면의 권정생을 찾았다. 1970년대 말이었다. 서울서 버스를 타고 일직 장터에서 내려 철길을 건너고 논두렁을 지나 종지기 동화작가를 만나곤 했다.
그때 그의 초상을 작품으로 남겼다. 밀짚모자를 쓴 야윈 농부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얼굴과 이마, 목에 큰 주름은 평생 병을 달고 힘들게 살아온 육신을 보여준다. "그때도 참 많이 아파했었다"고 한다. 그가 쳐다보는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 있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염원일까.
그런데 눈 가장자리에 눈물 같은 것을 달고 있다. "하루는 저를 배웅한다고 한참을 같이 걸어 나왔어요. 그때 봄 가뭄이 심했어요. 가물어 배배 틀린 보리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너도 목이 마르겠구나.'"그때 언뜻 본 권정생의 눈에는 작은 생명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하늘을 덮을 만한 사랑이었다.
이 초상은 1981년 출간된 그림 명상집 '응달에 피는 꽃'(분도출판사)에 발표됐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민중들의 피폐된 삶을 담았다며 판금됐다. 그리고 이 초상도 잊혀졌다. 원작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 작가도 이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출판사만 1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본인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눈 가장자리의 눈물만으로 권정생의 삶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초상이다. 이 초상이 신문지상에 나온 것은 처음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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