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생의 땅 가야산] (48)한개마을 '북비(北扉)고택' 유래

사도세자 향한 애끓는 충절…북으로 문을 내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했다. 성산 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인 한개마을은 조선 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입향한 이후 500여년을 이어 내려온 전통 깊은 마을이다. 또 최근에는 이 마을에 살았던 이석문(李碩文)을 주인공으로 한 대하역사소설 '북비(北扉)'가 선을 보여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고풍스런 한옥들과 아름다운 돌담길을 보려고 한개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이래저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한개마을을 찾아나섰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로 '한개'라는 이름은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뒷산인 영취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하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 이곳은 옛날부터 길지(吉地)로 꼽혀왔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개마을에는 가옥 60여 채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개마을에서 먼저 찾아간 곳은 마을 오른쪽 편에 자리 잡은 북비(北扉)고택.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이던 이석문이 1774년에 터전을 잡은 집이다. 그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간(諫)하여 막고자 했으나 오히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낙향했다. 지금의 터에 집을 세우고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집의 명칭이 북비인 것은 북쪽으로 낸 사립문에서 유래됐다.

이석문의 충절이 스며있는 듯 북비란 현판이 걸린 작은 사립문이 오래도록 눈길을 붙잡는다. 소설 '북비'의 주인공이 북비고택을 지은 이석문이다. 소설에는 이석문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 노론과 소론 세력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이 교차하는데 조만간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란다. '북비'와 관련된 아름다운 후일담도 전해온다. 이석문의 후손이 문과에 장원급제했을 때 정조는 "너희 집에 지금도 북비(북쪽으로 낸 대문)가 있느냐?"고 친히 물었다. 정조로서는 선친인 사도세자를 충성스럽게 모셨던 신하의 집안 안부를 물은 것이다.

북비고택은 '대감댁'으로도 불린다. 조선 말 공조판서를 지낸 이원조(李源祚)가 이곳에서 살았던 연유에서다. 북비고택을 지키고 있는 성산 이씨 종손 이수학(70)씨가 취재진을 맞았다. 그는 얼마 전 자전적 수상집 '공수래 공수거'를 펴내기도 했다. "인생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손을 맞잡고 왔다가(拱手來) 내 사명을 다함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두렵고 아쉬운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고 돌아가는 것(拱手去)"이라는 게 이씨의 지론이다. 박약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또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는 얘기도 수차례 강조했다. 영남 남인으로 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이원조를 두고 일부에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했으나 실상은 선조들의 엄한 교육과 지극한 정성이 토대가 돼 그 같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런 노력 없이 요행으로 가문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인물을 낳을 수 없다는 이씨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선조들은 자식들을 꾸지람할 때 목침 위에 올려 세우고 종아리를 때렸는데, 이 집안에서는 이 목침을 특별하게 '경침(警枕)'이라고 불렀다. 북비고택 사랑채에 걸린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라는 현판도 같은 맥락에서 눈에 쏙 들어온다. 독서를 통해 자식들을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원조가 증조부의 가르침을 되새겨 건 것이라고 한다. 이씨는 "한개마을을 찾아오는 분들이 고택 등 외양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많이 배우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한주종택. 한개마을의 가장 안쪽 산울타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집은 1767년에 처음 지었고, 성리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그의 호를 따라 한주종택으로 부른다. 이 집에서는 이진상 등 이름난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주의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한주와 대계의 호를 각각 새긴 현판이 종택을 찾은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성리학 연구 터전으로 유명한 한주종택 내의 한주정사는 그 배치의 특이함 때문에 유명세를 타는 곳. 대개 건물 앞쪽에 연못을 두지만 이곳은 옆에 연못이 들어섰다. 연못에서는 새로 단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는 등 한국형 정원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영화 '성춘향뎐'을 비롯해 전설의 고향 등 숱한 TV사극 드라마의 단골 세트장이 된 곳이기도 하다.

북비고택, 한주종택 외에도 한개마을에는 경북민속자료 또는 경북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된 고택들이 많다. 교리댁, 월곡댁, 진사댁, 도동댁, 하회댁, 극와고택, 첨경재, 삼봉서당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교리댁은 돌담이 둘러진 대문채가 평지보다 높은 곳에 있어 중후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또 사랑채 앞에 있는 노둣돌(하마석:말을 탈 때 발돋움하려고 놓은 돌)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한개마을에서 고택과 함께 또 다른 주인공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고샅길. 고샅길 담장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것으로, 그 푸근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황토흙 사이사이에 크기,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았다. 언뜻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지만, 멋스럽고 자연미가 흘러 넘친다. 3천300m나 이어지는 이 돌담길은 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한개마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선비들의 꼿꼿한 정신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이 많은 이유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많다

남서로 영산 가야산을 품고 있는 성주. 정기가 흘러넘치는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姓氏)가 유달리 많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박재관 성주군청 학예사가 지난 2000년 시행한 인구 총조사를 토대로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그 인구수를 조사한 결과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모두 30성관(姓貫)으로 나타났다.(표) 다만 배씨와 여씨의 경우에는 성주, 성산으로 조사되기는 하였으나 큰 범주에서는 같은 성관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28성관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박 학예사의 얘기다. 박 학예사는 "한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관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예부터 큰 고을이었던 곳이 아니고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별 고을, 성주는 역사적으로 매우 큰 고을이었다. 기원전 2, 3세기 성산 가야 부족사회에서 발전된 가야 연맹의 세력은 지리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완충지역을 차지해 내실외화(內實外和)의 슬기를 다져, 다른 가야 동맹국들이 망한 후에도 500년을 넘게 역사를 이어나간 끈기를 엿볼 수 있다는 게 제수천 전 성주문화원장의 얘기다. 또 고려 건국 초에 성주는 경산부(京山府)라 하여 이조 태종 때까지 400년 동안 지금의 충북 옥천과 영동군까지 관할했고 김천, 칠곡, 대구, 달성, 고령군 등은 1600년대에서 1900년대 초까지 600~900년을 각각 관할한 대단한 고을이었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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