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상식의 힘과 시민의식

미국산 쇠고기 수입방안에 항의하며 시작된 촛불집회가 40일을 훌쩍 넘겼다. 초기에는 중고교생들이 중심을 이루었다면 지금은 남녀노소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민 모두의 활동으로 발전하였고, 광우병의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면한 요구에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키고 찾겠다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심화되었다. 급기야 출범 후 백일을 갓 넘긴 새 정권의 내각이 총사퇴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앞에 마치 역사가 그 빛나는 한 장을 펼쳐 보이듯이, 어린 학생들의 작은 항의의 촛불들이 온 거리를 뒤덮는 수십만 시민의 장엄한 행렬로 옮겨가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놀랍기에는 수천,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약간의 충돌이 없지는 않되 평화집회의 원칙이 끝까지 관철되고 있다. 유럽출신의 한 주한대사는 이 사태가 드골 대통령의 하야를 낳은 프랑스의 68항쟁과 같은 혁명적 상황인지 궁금해 했는데, 파리의 그 한달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폭력으로 점철되지 않았던가?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는 이 축제와 같은 시민운동의 마당에는 유래를 찾기 힘든 새로움이 있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넉넉함과 자유로움이 있다.

배후 운운하며 협정을 옹호하던 정부가 시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고 나선 만큼 결과를 지켜보아야겠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은 상식의 힘이다. 과학을 들먹이든 관례를 내세우든 아무리 그 정당함을 선전하고 강요해도 건강권을 침해하는 협정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상식이다. 재협상은 없다고 아무리 정부가 못을 박아도 국제통상에서 재협상의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것을 아는 국민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대운하를 해야 할 이유를 아무리 많이 내놓아도,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 산맥을 뚫어 억지로 내륙운하를 만드는 것이 생뚱맞다는 상식은 이겨내지 못한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우리에게 불공정한 쇠고기 수출 협정을 맺은 미국이 독립국가로 탄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이 상식의 힘이었음은 아이러니하다. 1776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게끔 촉발했던 것이 토머스 페인의 '상식'이라는 팸플릿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팸플릿은 발간 석달 만에 12만부, 1년 사이에 50만부가 팔리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 당대의 상식이 되었다.

페인의 팸플릿은 미국독립을 뒷받침하는 문헌이지만, 정부와 사회를 구별하는 첫 대목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페인에 따르면, 사회란 국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룩해나가는 것이며, 정부는 그것이 잘 되도록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어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그 목적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는가에 비추어 평가받고 제 역할을 못 할 때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미국과의 잘못된 쇠고기 협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에 위해를 끼쳤다면, 한국의 시민들은 이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페인의 상식인 셈이다.

미국 내의 친영파들의 논리를 물리치고 페인의 주장이 상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식민지의 폐해를 미국시민들이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건강한 사회의식과 성숙한 인식을 통해 획득된다. 촛불집회에서 엿보이는 상식의 힘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길러지고 튼튼해진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지난 10년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것이 현 집권당의 선거구호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구호를 되뇌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이 되었음에는 자부심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잃어버렸다는 10년 사이에 외환위기에서 탈출하여 경제대국이 되는 성장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 대개는 멋쩍어한다. 구호는 구호일 뿐이니까. 그렇지 않고 이 상식에 맞서려고 들면 궤변이 나오고 아집이 생긴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 잃어버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다면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이처럼 시민들 사이에 상식의 힘이 널리 퍼져 있음을 꼽고 싶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지만, 상식이 살아있는 한 믿어도 좋을 법하다. 촛불집회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윤지관(한국문학번역원장, 덕성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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