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속 멋진 비 장면

비오는 날마다 수제비를 해 먹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또 '비오는 날의 수제비'가?"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패러디다. 그때는 수제비가 지겨웠는데, 요즘에는 비만 오면 수제비가 생각난다.

얼마 전 '밀가루에 항우울성분이 있다'는 외신 보도를 접했다. 우리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가 과학으로 증명된 것이다. 비오는 날의 우울함을 밀가루 속 항우울성분으로 이겨내려고 했던 지혜다.

비오는 날 잘 듣는 노래가 있다. 브룩 벤튼의 'A rainy night in Georgia'나 권진원의 '비오는 거리에서', 이승철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등이다. '비오는 거리에서'는 너 없이 비오는 거리를 걸으면 눈물이 나 '다시 한 번만 우연히라도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굴욕도 아름답겠지'라고 노래한다. 그 어떤 굴욕도 좋으니 다시 한 번만이라도 너를 보고 싶다는 말이 비처럼 애절하다.

'쉘부르의 우산' '사랑은 비를 타고' '애수' 등 영화 속 멋진 비 장면이 많다. 데이빗 핀처의 공포영화 '세븐'은 DVD를 틀어놓으면 영화 내내 방안이 빗소리로 가득 찬다. 우리영화 '접속'이나 '클래식' '연애소설' '쉬리' 등에서도 예쁜 비 장면이 나온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비오는 날 노란 은행잎이 내린 계단에서의 살인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알 파치노의 영화 중에 참 예쁜 비 장면이 있다.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칼리토'(1993년)다. 가석방된 전직 마약상 칼리토(알 파치노)는 이제 뒷골목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마피아는 그를 다시 범죄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집요한 추격 속에서도 그는 옛 애인 게일(페넬로프 앤 밀러)과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꾼다.

비가 쏟아지는 날, 그는 건물 옥상에 올라간다. 사랑하는 게일이 춤 레슨을 받고 있는 건너편 건물을 보기 위해서다. 따스한 조명을 받으며 실내에서 춤추는 게일은 그가 그토록 찾고 있는 행복이다. 비를 피하기 위해 쓰레기통 뚜껑을 들고 게일을 바라보는 칼리토의 흠뻑 젖은 눈빛이 그렇게 처연할 수가 없었던 장면이다.

그래도 최고의 비 장면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년)다. SF영화로 미래는 산성비만 추적추적 내린다. 4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복제인간들이 탈출한다. 그들을 쫓는 경찰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리더인 로이(룻거 하우어)와 마지막 결투를 벌인다. 그날도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마지막 로이는 비를 맞으며 비둘기를 안고 죽어간다. 죽기보다 수명이 다해 기능이 멈추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복제인간의 비애를 읊는다. 행성에서 바라본 장엄한 태양, 우주에서 펼치는 혹독한 전쟁을 얘기하며 기억과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그는 마지막 이 말을 하고는 자신의 시간을 멈춘다.

비와 관련된 노래와 영화들은 대부분 우울하다. '항우울'은 우울을 더 자극하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열치열' 하듯이 우울로 우울한 장마를 이겨내는 것은 어떨까.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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