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팔공산 횡단터널을 뚫는 공사가 막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칠곡 동명과 군위 부계 사이를 곧장 연결하는 이 도로가 개통되면 팔공산 북쪽에 자리한 군위삼존석굴을 찾아가는 길은 지금보다 훨씬 단축될 전망이다.
대구 인근에서 으뜸가는 유적탐방지로 소문난 이곳은 지난 1962년 12월에 국보 제109호로 지정될 당시부터 공식적으로 군위삼존석굴이라는 지정명칭이 주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이름보다 '제2석굴암'이라는 표현을 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찌하여 '제2석굴암'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명칭은 이 석굴의 발견 당시 언론매체 간의 과열보도가 만들어낸 부산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군위삼존석굴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62년 10월초의 일이었다. 일제 때의 고적조사자료에도 엄연히 채록되어 있던 이곳이 새삼스레 '대발견'의 대상으로 둔갑하여 신문지상에 특종보도되었던 것이 그 계기였다.
이에 따라 한적하기 그지없던 이 골짜기는 느닷없이 문화재조사단, 대학교수, 지방관리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특히 여러 신문사에서는 보도경쟁이 일어나 재빨리 특파원들을 현지로 파견하여 석굴의 현황이나 마을주민들의 증언까지 시시콜콜하게 연일 대서특필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군위삼존석굴의 존재가 포착되자마자 행정당국도 크게 흥분하여 특종보도가 나온 그 다음날로 도지사까지 곧장 현지를 탐방하였고, 이내 이곳까지 연결되는 도로를 수선하는 것은 물론 이 일대를 대규모 관광지대로 건설한다는 계획이 쏟아져나왔다. 팔공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대구에서 군위석굴까지 곧장 연결한다는 얘기도 그 당시에 거론되었는데, 이렇게 본다면 이번에 착공한 터널공사는 무려 46년 만에 그 결실을 본 셈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경쟁이 벌어지는데 있어서 각 언론매체마다 가장 애용한 표현이 바로 '제2석굴암'이었다.
그 무렵은 때마침 일제가 시멘트를 발라 망쳐놓은 경주 석굴암을 다시 헐어내어 이중방수막을 설치하고 전실의 굴곡부를 바로 펴는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가뜩이나 석굴암에 쏠려있던 판국이었는데, 여기에다 또 하나의 석굴이 새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대단한 호응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이름을 주저 없이 제2석굴암이라고 붙인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다. 하지만 군위삼존석굴을 일컬어 아직껏 제2석굴암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지 온당한 일로 보이지는 않는다.
군위삼존석굴의 조성연대는 경주 석굴암의 석굴에 훨씬 앞서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원조' 석굴암이라면 몰라도 이것이 결코 '아류'의 인상을 주는 '제2의' 석굴암은 될 수 없기에 하는 얘기이다. 그리고 군위삼존석굴은 경주 석굴암의 그것과 반드시 동일한 양식의 석굴형태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국보 제24호로 지정된 경주 석굴암의 정식명칭이 '석굴암 석굴'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정확한 대상물은 석굴암 일대가 아니라 석굴 그 자체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듭 말하여 팔공산 석굴은 '제2석굴암'이 아니라 반드시 '군위삼존석굴'이라고 불러야 옳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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