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문계↔자연계 선택 갈림길…高1 '심사숙고'

김모(18)양은 고1 때 자연계를 선택했다. 수학 성적이 괜찮은데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빨리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고2 때 자연계에 들어가자 수학시간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불안해졌다. 공부도 어려워져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적성과 심리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자신이 자연계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았다. 결국 김양은 고3 때 어렵사리 인문계로 계열을 바꿨다.

고교 1학년들은 이맘때 자연계로 갈 것인지, 인문계로 지원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고교 때의 계열선택은 자신의 인생 설계에 중요한 갈림길이 되기 때문에 무겁고 신중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런 선택 과정이 가볍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가벼운 선택 많다

대부분의 고1 학생들은 입학하기가 무섭게 진로적성검사를 치른다. 보통 4월쯤 외부기관 위탁 검사를 받는다. 그 결과가 5월 말이나 6월 초에 나오면 학교는 학생들이나 부모에게 그 결과를 알리고 각각 선택 설문지를 준다. 학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9월쯤까지 두세 차례 계열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상당수 학교들은 학생들이 계열을 자주 바꿀 경우, 학사 일정이나 교과서 주문, 반 편성 등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1학기 때 계열 선택 과정을 끝내는 편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계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촉박하고 충분한 상담 등이 이뤄지지 않아 형식적이거나 특정 과목 성적 위주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재수생 석모(19)군은 고1 때 단순히 수학과 과학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자연계를 선택했다. 하지만 고3이 되자 언론계 직업에 흥미가 생겼다. 석군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인문계로 가야 되겠다는 생각에 담임교사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문계로 계열을 바꾸었다. 석군은 "보통 학생들은 자신이 잘하는 과목을 보고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설문지도 일주일 만에 학교에 내야 하는 등 심사숙고할 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말했다.

고3 때 자연계에서 인문계로 바꾼 이모(18)군도 "보통 학교 분위기가 공부 잘하는 학생은 자연계, 공부가 뒤처진다 싶으면 인문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했다. 한 반에서 1~10등 정도 하는 학생들 중에 2, 3명 정도만이 인문계로 가는 실정이라는 것.

또 계열 선택에 있어 학생보다 학부모의 선택이 큰 영향력을 미친다. 지난해 계열 선택을 두고 자녀와 갈등이 있었다는 홍모(47·여·대구 동구 방촌동)씨는 "보통 부모 입장에선 아이의 흥미보다는 취업이 잘 되고 전망이 좋은 쪽으로 선호하기 마련"이라며 "수학 성적이 괜찮으면 자연계를 가라고 강요한다"고 했다.

계열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줘야 할 진로적성검사도 그저 참고사항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검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 제대로 해석하는데 학생당 40~50분가량을 투자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김모(37) 교사는 "담임이 검사 결과를 분석하기엔 전문지식이 부족할 뿐더러 학사 일정에 쫓겨 결과를 획일화시키는 경향이 많다"고 했다.

◆고교 계열과 진로는 다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상 대학 입시 때 교차지원(자연계 수능을 치르고 인문계로 진학하거나 그 반대로 진학하는 것)을 하거나 대학에서 전과(轉科) 등을 통해 계열을 바꾸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로 인해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것.

대학 2학년 이모(20·여)씨는 올해 초에 전과를 했다. 생명공학부에서 경제금융학부로 계열을 바꾼 것. 이씨는 고1 때 자연계열을 가고 싶었지만 수학이나 과학 성적이 좋지 않아 인문계를 선택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었기에 미래가 두려워졌다. 전망이나 취업 등을 고려해보니 공대 계열이 자꾸 눈에 들어왔고 대학 입시 때 불이익을 감수하고 생명공학부로 교차지원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 수업을 해보니 버겁다는 걸 느꼈다. 과학 등 자신이 안 배운 것이 많아 따라가기가 힘이 든 것. 결국 고심 끝에 이씨는 전과를 결심했다. 이씨는 "적성을 찾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다 보니 불필요한 시간이 너무 낭비된 것 같다"고 후회했다.

200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2005년 4년제 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출신 고교의 계열과 대학 졸업 때의 전공계열을 조사해 비교한 결과, 고교 인문계 출신 학생의 12.9%는 대학에서 자연계열을 전공해 졸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고교 자연계 출신 학생의 13.8%도 인문계열로 졸업했다. 인문·자연 계열 학생 모두 고교와 대학 때 전공이 일치하지 않은 비율이 대략 13% 정도였다.

한 진로 상담 전문가는 "2002년 고교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된 이후 사실상 인문계, 자연계 구분이 없어졌는데도 학교들은 입시지도 편의를 위해 편법으로 학생들을 인문계, 자연계로 나누고 있다"며 "이는 학생들에게 의식적으로 과목의 장벽을 만들어 본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으며 결국 사회적 낭비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