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촛불 끄고, 화합의 아침 준비하자

참으로 놀랍고도 숨가쁜 두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단순히 몇몇 젊은이들의 불만 표출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작은 촛불들의 모임은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오만한 정부에 대한 질책의 들불로 타올랐다. 마침내 정부가 이에 굴복하여 두 번에 걸친 대통령의 사과와 청와대 보좌진 전면개편 단행과 대폭개각을 준비하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마저 그토록 고집하던 협약변경 불가의 원칙을 굽혀서 추가협상을 받아들였다.

정부 여당에서는 아무리 촛불의 힘이 거세더라도 설마 불과 몇 달 전 선거에서 보여준 압도적 지지가 바뀌기야 하랴 하는 기대도 있었겠으나, 결과는 그 기대를 무참히도 깨뜨렸고 대통령은 10%대라는 초라한 지지율로 성난 촛불 앞에 서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사실의 의미를 해석하기에 분분하다. 논란은 있되 대체로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쾌거요, 위대한 국민 승리의 드라마라는 데 공감을 하는 듯하다.

이렇듯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촛불집회의 주최 측은 아직도 촛불집회를 계속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전면 재협상이라는 원래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촛불을 계속 들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아예 정권퇴진 운동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러나 過猶不及(과유불급)이다. 그만하면 정부의 오만에 대해 충분히 경종을 울렸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을 거의 모두 얻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현실적으로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것까지도 얻겠다고 촛불을 드는 것은 오히려 역풍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이 일정 부분 해소되었고, 이명박 정부의 오만으로 비쳤던 한반도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 강부자·고소영 내각에 대해서도 눈에 띄는 후퇴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의 집회 강행으로 얻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따라 끝까지 남을 사람들도 점점 소수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 경제에 드리운 불안한 암운을 간과할 수 없다. 유가 및 원자재가 폭등과 세계적 경제침체의 영향으로 우리 경제도 온통 붕괴 일보직전의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이러한 위기는 민중항쟁이 아니라 합리적이고도 강력한 정책적 리더십과 국민적 화합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위기의 고통은 아마도 광우병과 비교도 안될 만큼 견디기 어려울 것이고, 그 고통은 부유층보다는 서민층에 훨씬 크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촛불집회의 장기화가 가져온 사회적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교통체증, 노동력 손실, 소음과 파괴 등 눈에 보이는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도 정부에 대한 신뢰의 훼손이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는 효과와 더불어 올바른 정책에 대한 추진력까지도 손상시킴으로써 치르게 된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훨씬 엄청날 것이다.

촛불집회는 지금 4·19, 광주항쟁, 6월항쟁과 같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전통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모범적 전형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절제되지 않은 욕구의 분출로 자기부정과 사회파괴에 다다르고 만 잘못된 전형으로 남을 것인가를 가름하는 분기점에 와 있다. 이제는 그 치열했던 대장정의 막을 내리고 아름다운 역사로 남아야 할 때이다. 그래야 언제라도 정부가 또 국민을 배신하거나 무시할 때 다시 타오를 명분과 동력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계속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목소리의 뒤안에는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계속적인 불신이 폭넓게 깔려 있음을 명심하여 집권기간 내내 국민의 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는 진정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촛불은 또 다른 외침으로 언제든지 다시 타오를 것이기에.

이용두 대구대 총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