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11시 대구 수성구 수성2가의 한 고물상. 백발이 성성한 80대의 할머니가 짐이 가득 실린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왔다. 신문지와 빈 종이 박스, 하얀 철제 대야가 할머니 키만큼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모아온 폐지는 kg당 160원이었다. 두툼하게 수레를 가득 채웠지만 정작 무게는 얼마 안 된다. 그나마 백철은 시세가 좋아 1천500원(kg당)을 받는다. 새벽부터 거리를 돌아 손에 쥔 돈은 하루에 3천600원 정도다. 할머니는 계산이 끝나자 빈수레를 끌며 또다시 거리로 향했다.
3년째 고물상을 운영해온 오은주(43·여)씨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얼마전부터 가끔씩 폐지를 주워 오시는 새 얼굴"이라며 "요즘에는 폐지를 모아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아졌다. 작년보다 2배 이상 늘었다"고 했다.
고물가시대 한푼이라도 벌려 노인들이 이른 새벽부터 거리로 나서지만 '폐지시장'에도 불경기가 불어닥치고 있다. 폐지량은 예전과 비슷하지만 줍는 사람들이 늘면서 벌이는 시원찮아졌다.
2년째 폐지를 줍고 있다는 박모(68) 할머니는 "예전에는 폐지를 줍는다고 불쌍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요즘엔 자기들이 수레를 끌고 다닌다"며 "지난해에는 하루 3, 4시간만 돌면 수레를 어느 정도 채웠는데, 올 들어서는 하루종일 헤매고 다녀도 폐지가 모이질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급기야 지난달부터는 새벽 2시에 거리를 나선다. "가요방이나 술집에서 나오는 파지나 알루미늄 깡통을 차지하려면 일찍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버는 돈은 1만5천원 정도. 이마저도 일정치는 않다고 했다.
김모(74) 할머니는 폐지를 주우려는 '경쟁자'들이 늘면서 단골 확보에 나섰다. 자주 들러 안면을 익힌 뒤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도 한다. "가끔씩 가게 주위를 청소도 해줘, 그래야 나한테만 주지."
그러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면서 인심도 각박해지고 있다. 폐지를 모아 노인들에게 건네주던 가게나 사무실도 확 줄었다.
오후 1시쯤 서구 원대동의 고물상. 한 청년이 주인에게 폐지 단가를 묻고 가더니, 잠시후 리어카에 A4용지로 된 서류를 가득 싣고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받은 돈은 5만원. 주인은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도 휴일에 신문을 묶어오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신문 50kg을 가져와 받는 돈은 1만원 정도. 무료생활정보지는 든든한 돈벌이가 되다 보니 노인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돌린다. 반나절을 다녀 7천원을 벌었다는 70대 할머니는 "물가는 오르는데,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없으니 폐지라도 주워야 먹고살 수 있다"고 했다.
15년째 폐지를 줍고 있다는 이모(47·여)씨는 "못살았던 어린 시절에 봤던 넝마주이가 다시 생긴 것 같다"며 "폐지나 빈병 등을 주워 파는 것 말고는 돈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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