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개학전 몰아치기 일기 쓰기

'즐거운 여름방학' 큼지막한 글씨와 매미채를 든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있다. 방금 학교에서 받아 온 책을 넘겨보지도 않은 채로 평상 위에 던져놓고 망아지처럼 들로 산으로 뛰어나갔다. 각설이 패거리처럼 몰려다니며 매미도 잡고 나비를 잡으며 그러다 배고프면 산딸기로 허기를 채워가며 놀았다. 더위에 지치면 숲 그늘에서 공기놀이를 했다. 팔딱팔딱 고무줄놀이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거친 사내아이들은 땅따먹기 놀이하다가 여기는 "내 땅이야 아니야! 내 땅이야" 하며 멱살을 잡으며 싸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봉이 '김선달' 생각이 난다. 해가 머리 꼭대기쯤 올라오면 울릉도 호박엿장수 요란스러운 가위소리가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고 사라졌다. 뒤를 이어 마을 어귀에 슬그머니 나타나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군복상의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왼팔에는 쇠갈고리를 끼워서 손을 대신하며 네모난 나무상자를 어깨에다 둘러메고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에게는 반갑기도 하지만 또 하나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화롯불에 콩 튀듯이 튀면서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멀쩡한 고무신을 찢어서 호박엿을 사먹고 그 벌칙으로 하루 종일 밥을 굶는 아이도 생겼다. 아버지 농주 담긴 술병을 양푼이에다 쏟아놓고 유리병을 들고 나오다 엄마에게 끌려가는 아이도 있고, 그때는 밥은 안 먹어도 그것들만 실컷 먹어보는 것이 우리들의 소원이었다. 꼬챙이가 뚫어져라 빨고 또 빨아먹던 그때의 아이스께끼 맛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다 큰 여자아이면서 부끄럼도 없이 발가벗고 물장구치며 놀았던 냇가웅덩이는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수영장이며 유일한 해수욕장도 되곤 했었다. 지금 아이들과 비교해본다면 천국에서 사는 아이들 같았다. 방학중간 무렵이 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재 너머 사래 긴 논에서 풀을 메는 아버지 새참을 가지고 간다.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산길을 오른다.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한 걸음을 떼면 쫄쫄 술이 주전자 입으로 흐른다. '꼴깍' 한 모금 먹었다, 또 쫄쫄 '꼴깍꼴깍' 술에 취해 걸음이 비틀거리니 산꼭대기가 눈앞에 왔다가 갔다. 냇가 버드나무도 걸어 다녔다. 길바닥 먹이는 것이 아까워 내가 먹었는데 이걸 어쩌나! 밤나무 밑에 잠깐 누웠다 간다는 것이 일어나니 해가 서산에서 '빠이빠이' 를 하고 있었다. 달음박질을 하여 아버지 앞에 다다르니 술이 한잔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구 이제 살았다" "이눔아! 애비 목말라 죽을 뿐 했다" "다음에는 짚으로 주전자 입을 막아서 오너라" 입맛을 쩝쩝 다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아버지! 오십을 훌쩍 넘겨 지금 생각해보면 꿈같은 시절이었다.

오늘도 슈퍼에서 막걸리 병을 물끄러미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시절에도 플라스틱 저 병이 있었다면 바지게에다 두 세 병 얹어 가서 새금 없는 도랑물에 담가두었다 허기질 때마다 드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생각으로 고향 쪽 하늘을 바라보며 등이 굽었던 아버지 생각에 잠긴다.

한 달은 그렇게 가버리고 개학할 날이 눈앞에 턱 와 앉아있었다. 호롱불을 켜놓고 졸음과 모기를 쫓아가며 맨 꼭대기 날씨 난에는 무조건 맑음, 흐림, 비, 차례대로 반복해서 썼다. 그때는 일기 쓰기 숙제는 죽기보다 더 하기가 싫었다. 오늘의 한일 난 에는 '밥 먹고 놀고 공부했다 그리고 잤다'로 빈칸을 메웠다. 가끔 색다르게 '개떡도 먹고 옥수수 감자도 먹었다'라고 썼다. 이만하면 손바닥은 맞지 않겠지 내 스스로 만족해하며 잠을 청했다 .

개학 다음날 담임 검하고 크게 찍힌 과제물들을 돌려주시던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선이랑 미자는 한 동네에 살제?" 하고 물으셨다. "예!"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런데 미자는 8월 15일이 비가 왔고 선이는 맑음이라고 썼구나. "하늘이 참 이상도하구나" 하시는 말씀에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깔깔 웃었다. 그 미자 라는 아이는 우리 반 부 반장이었다. 내가 엉터리라는 것은 말해주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그 후 겨울방학부터는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늘을 먼저보고 날씨 난에 연필부터 가져갔다.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부 반장도 했다.

임잠선(대구시 수성구 만촌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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