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국회 첫 본회의가 열린 현장에서 이번 국회의 전반기 의장으로 선출된 김형오 신임 의장은 올해를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품격정치"의 원년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다. 국회가 정치적 계산놀이나 하면서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분명 품격을 잃은 국회일 수밖에 없다. 근자에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직접 소리친 외침 역시 국회 스스로가 품격을 상실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임 의장의 주장처럼 국회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품격정치를 했더라면 국민이 직접 행정부를 향해 비판의 몸짓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무한경쟁 내지는 과다경쟁으로 인해 서로 품격을 상실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품격은 "사람이나 물건에서 느껴지는 품위"이다. 그러므로 품격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관계하는 물건에도 적용된다. 인품이든 물품이든 격이 갖추어져야 제멋을 지니는 법이다. 그러나 이 멋 역시 인간으로서의 기본생활조차 위협받는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개념이 될 수 있다. 사실 극도로 가난하게 살거나 외부로부터 위협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처참한 현실에서는 품격이라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라와 언어를 잃고, 6·25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채 눈물을 품에 안고 살았던 한국 현대사는 품격을 갖추기에는 너무나 척박했던 현실이었다. 우리의 국가와 민족은 오로지 힘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 지상의 제일 과제였다.
한국 현대사의 이와 같은 상황은 힘을 추구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우리의 국가와 구성원은 힘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 제각기 노력해왔다. 이 와중에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참여하여 권력을 누린 자가 있는가 하면, 인권을 유린당한 자도 있었다. 군사정권 몰락 이후 지난 10년간, 진보진영은 서구의 복지국가처럼 사람답게 사는 국가를 만들어 보려고 하였지만, 그 역시 좌절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더 강하게 밀려드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에는 품격을 고민하는 '된 사람'보다는 경쟁력을 갖춘 '든 사람'이나 '난 사람'이 더욱 더 중요시되고 있다. 마치 삶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결투의 장처럼,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모두는 인정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데 급급해 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역시 품격보다 경쟁력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쟁력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취급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 정부의 출현과 그 이후의 전개과정으로부터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국가의 도덕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가치를 앞세우면서 출범한 현 정부가 내세운 중요한 목표는 실용성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선진화된 국가이다. 이 역시 경쟁력을 중요한 기초로 삼고 있다. 그러나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품격이 제대로 마련될 수 없다. 이번 쇠고기협상의 비극 역시 이런 현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 국가 구성원들의 먹을거리는 상거래정신에 의해서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국가는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여 경쟁력을 갖추는 것 못지않게,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요즈음 세계경제가 어렵고, 또 우리 경제 역시 어렵다고 하여 우리 모두가 품격을 잃어버릴 정도로 천박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못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의 품격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가진 자들은 못 가진 자들의 외침을 불순하게 바라보고 있다. 품격은 당당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열린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품격은 자기의 목소리만 내고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홀로주체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나 상대에게 말을 하되 또 귀를 기울이는 서로 주체에서만 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많은 갈등들은 바로 이 품격의 부재에 근거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갈등의 삶에서 상생의 삶으로, 투쟁의 삶에서 품격의 삶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 가정과 학교는 품격교육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며, 정치권 역시 품격정치의 길을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김석수 경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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