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시위공화국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경찰청이 최근 제출한 자료에서 대한민국은 '시위공화국'임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최근 5년간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평균 1만1천161건의 집단시위가 발생했으며, 시위 참가자의 숫자는 연평균 272만7천411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년간 하루 평균 30건 정도의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집단시위 가운데 이른바 불법·폭력시위가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아 2004년에는 91건, 2005년에는 77건, 2006년에는 62건, 2007년에는 64건이었으며, 특히 금년에는 이미 77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올해 불법·폭력시위가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 촛불시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집단시위가 일상화되는 것도 사회적으로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이지만, 불법·폭력집회는 본질적으로 사회병리 현상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에 의하면 지난 5월 2일부터 8월 15일까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촛불시위는 직접 피해 1조574억 원, 간접 피해 2조6천939억 원 등 도합 3조7천513억 원의 금전적 피해를 우리 사회에 남겼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불법·폭력시위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단호한 대처를 豪言(호언)하고 있지만 솔직히 기대 半(반), 회의 半(반)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집단적 사회행동의 과격화를 어느 정도 관용하는 耐性(내성)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노동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의명분 탓일 수도 있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권위주의 통치체제에 온몸으로 맞섰던 학생운동의 추억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시절이 아니다. 조직화된 노동운동이 반드시 사회정의에 부합하는지도 곰곰 따져봐야 하고, 불법·폭력시위가 계속 필요할 정도로 한국 민주주의가 부실한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목청이 세다고, 행동이 격하다고 집단행동의 효과가 반드시 더 나은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집단시위조차 일종의 '문화'가 되어 사회질서의 일부로 수용된다. 특정 이슈와 무관한 일반시민들의 일상적 삶에 거의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메시지만은 분명히 전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우리 주변에서도 결코 과격하거나 폭력적이지는 않았던 시위문화의 한국적 典範(전범)이 하나 있었다.

1960년대 중후반 내가 처음 목격한 노동운동은 차라리 목가적이고도 낭만적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국가주도 경제개발에 일로매진하던 무렵, 당시 우리 집이 있던 대구시 북구 침산동 일대에도 졸지에 공업단지가 들어섰다. 그 결과, 나는 소년시대를 초기 산업화 시대 공장지대에서 보냈다. 그 즈음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매달 특정한 날짜 오후만 되면 종업원 부인들이 수십 명씩 어린 아이들을 업거나 안은 채 공장 정문 앞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날이 봉급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낙들이 남편이 받아오는 월급을 봉투째 확보하려는 전술인 줄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임금 체불이 예외가 아니라 관행이었던 시대, 그것은 노동자 가족들이 회사 경영진을 향하여 마침 그날이 월급날이며, 만약 봉급을 제때 받지 못하면 젖먹이 아기조차 제대로 양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無言(무언)의 시위현장이었다. 그와 같은 노동자 부인들의 평화적 간접 시위가 실제 얼마나 효과를 발생시켰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이것 이상으로 감동적인 노동운동이 또다시 있었는지도 나는 미처 모른다.

1960년대 후반 일인당 국민소득 수백 달러의 '헝그리(hungry)' 시대에는 이렇듯 집단시위조차 차라리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이룩하는 대가로 역사상 유례없는 '앵그리(angry)' 사회에 진입하였고, 오늘날 국제사회에서는 '시위공화국'이 국가브랜드처럼 되어 있다. 건국 60년을 성공적으로 자축하는 대한민국이 시급히 극복해야 할 오명이 아닐 수 없다.

전상인/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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