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박주산채일망정

서울의 주상복합아파트 값이 떨어진다고 난리란다. 집값 떨어질까 봐 여태 참아 왔는데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너나 할 것 없이 팔고 나오려나 보다. 사면이 유리로 된 고층에 창문이라곤 손바닥만한 것 하나가 달랑 있는 집이란다. 강제로 공기를 순환시킨다니 전기세도 만만치 않을 게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얼마나 답답하고 숨이 막힐까?

얼마 전 밀양 산내면에 있는 구만폭포에 갈 기회가 있었다. 모처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원한 냇물에 발을 담갔다. 고기 떼들이 마음껏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시간에 쫓기며 사는 나 자신의 삶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엔 분위기 좋은 막걸리집이 있다기에 일행은 표충사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울타리도 없고 그저 구름만 머물다 가는, 마당귀엔 때늦은 호박꽃이 웃으며 호박벌과 노는 외딴집이 기다리고 있다. 살평상에 자리 잡고 막걸리 한 동구리와 두부, 묵, 파전을 시킨다. 혈압에 좋다면서 주인 아지매가 덤으로 산채전을 부쳐 내놓는다. 한 잔을 들이켠 후 산채전으로 우르르 젓가락이 몰려 전은 금세 없어진다. 한 잔 또 한 잔에 너나 할 것 없이 취기가 돌고, 시답잖은 이야기도 입가심이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벌써 어둠이 깔린다. 가장 길치인 친구가 술 안 마신 죄로 차를 몰고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얼음골 쪽으로 가버린다. 그 바람에 냇가에 앉아 서비스로 받은 막걸리까지 동내며 모두들 오히려 희희낙락이다. 밝은 달은 신불산 위에 둥실 떠서 분위기를 돋워 주고, 냇가의 자갈밭은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달과 물과 산과 노래, 맑은 공기 속에 나와 그리고 벗들이 있는데 까짓 서울의 고층아파트에 사는 부유층이 뭐 그리 부럽겠나. 그야말로 무릉도원에 사는 신선이 따로 없다. 시조 한 수를 외어본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해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낙엽'과 '달'은 순수 자연을 대유한다. 세속의 부귀영화보다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의 풍류를 즐기는 옛 선인들의 모습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오는 주말쯤에는 단풍물이 들기 시작하는 산간 마을을 한번 다녀올 참이다. 산채전과 도토리묵, 그리고 막걸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겠다.

공영구(시인·경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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