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을 기반으로 재즈와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해온 뉴에이지 기타리스트.'
영국 출신의 기타 연주자 크리스 글래스필드(Chris Glassfield·56)씨를 소개하는 글이다. 클래식, 뉴에이지(New Age), 월드뮤직이라는 단어에 비해 그의 이름은 한국인에게 아직 생소한 편이다. 그러나 그는 예상 외로 한국과 꽤 긴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그의 음악은 드라마 '푸른 안개'의 삽입곡(Golden Land), 라디오 프로그램 메인 시그널 음악 등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귀를 자극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음악에 지친 이들의 귀에 쏙 들어갈 만한 감성을 지닌 곡들이다. 소공연장과 산사에서 열린 크고 작은 음악회에서 그는 한국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청도에 살고 있는 가수 이동원씨와의 듀오 콘서트를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4일 매일신문사 3층 회의실에서 만났다. 하얗게 센 머리에 온화한 표정의 외모. 깨끗한 영국식 억양이 듣기 좋았다. 지난 1일 입국하자마자 공연을 시작하는 등 피곤할 것 같음에도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동화사·비빔밥으로 기억되는 한국
인터뷰 전에 그에 관한 자료를 찾아봤다. 그러나 한국에 음반이 발매되면서 소개된 A4용지 한 장 분량의 내용만이 그의 음악인생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였다. 인터뷰 말미에 자신에 대한 자료를 찾을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지 않으며 사진도 안 모은다고 답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이에 대해 그는 "내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어제의 나일 뿐, 내 음악은 미래를 향해 있다.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며 현재와 미래에 충실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한국 방문을 네 번째로 기억하고 있었다. 첫 방한은 4년 전, 첫 공연은 대구에서 했다. 일본에서 공연을 하던 중 한·일 양국을 오가는 지인을 통해 한국과 첫 인연을 맺었다. 동화사에서 열린 산사음악회에 조나단 프라이스라는 연주자와 함께 공연했다. 한국에서의 데뷔를 대구에서, 그것도 통일약사대불 앞에서 한 셈. 그는 "하얀색 부처상(big white statue of buddha)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첫인상은 일본과 많이 달랐다"고 했다. 방한 전엔 "한국이 일본과 같을 것으로 생각" 했는데 막상 와 보니 "한국인들이 일본인보다 훨씬 더 따뜻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인을 영국인이나 북구인에 비유한다면 한국인은 지중해인이나 라틴 사람 같다. 그리 공손하진 않지만 훨씬 더 정직한 점이 편하다"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한국과 관련해 기억 남는 것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예상하는 것과 답이 다를 것"이라며 "음식"이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음식이 "정말로 좋고 건강에 아주 좋은데다 가격도 매우 싸다"며 팔공산에서 먹었던 보리밥 뷔페를 예로 꼽았다. 채식주의자인 그에게 "자신이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고 값도 싼 환상적인 음식"이란 평가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래서 그는 '비빔밥'이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들어보고 싶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이번 공연 레퍼토리에는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 한국에 대한 그의 기억 목록에는 절(寺)도 들어 있다.
◆록·클래식·재즈 거친 자연주의자
크리스 글래스필드의 음악 인생은 10대 시절 시작됐다. 당시는 프로그레시브 록(Progressive Rock)의 황금기인 1960년대 후반으로 제네시스(Genesis), 예스(Yes) 같은 밴드들이 인기를 구가하던 때이다. 기타 치기를 좋아했던 그는 긴 머리를 기른 기타 영웅(Guitar Hero)이 되고 싶었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흥미로웠던 시절이었다. 5, 6년간 전자기타를 치던 그는 대학에 진학해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다. 그러면서 재즈를 익혔고, 나중에는 인도 음악을 비롯한 월드뮤직으로까지 지평을 넓혔다. 무엇이 그를 이 같은 음악 순례 여정에 들게 했을까.
-록 기타를 치다 클래식 기타로 바꾼 이유가 있다면요?
"좀 더 성숙해진 거지요. 20대 초반에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클래식 기타란 게 평생을 해도 마스터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죠.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덜 지루합니다. 80, 90세가 되어도 여전히 배울 게 있어요.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과의 차이쯤이라면 될까요."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뭔가요?
"언제나 재즈를 좋아했어요. 저한테 음악은 음악일 뿐입니다. 들어서 좋으면 연주해 보고 싶은 거죠. (대구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들었던 한국 전통음악(唱)도 제귀에는 낯설었지만 패턴이 재미 있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음악이라도 내겐 흥미롭죠. 클래식 음악이 훈련(discipline) 같고 거기에 형식미(formal beauty)가 있다면 재즈엔 표현의 자유가 있어요. 제겐 이런 게 완벽한 방식입니다. 훈련을 통해 기교도 늘고 자유롭기까지 하니까. 어느 누구도 완벽함을 성취할 순 없겠지만 시도해 보는 건 재미있는 여정이죠."
-월드 뮤직에 관심을 가진 것도 마찬가지인가요?
"네, 그건 색채와 같아요. 자신을 화가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여기에선 이 색을, 저기에선 다른 색을 가져오듯이, 다른 리듬과 화음을 가져다 한데 버무리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걸 통해 음악이 다양해지겠군요?
"그렇죠. 여러 가지를 섞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제 천성이거든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기타를 든 '작가'(compos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타는 '타자기' 같은 거죠. 글을 쓰는 작가에게는 얼마나 빨리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저는 제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사용합니다. 결국엔 기타라는 것도 '줄 달린 나무판'에 불과하거든요. 경배해야 할 대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연필이나 종이 같은 것들이죠."
-월드 뮤직으로는 어떤 음악을 연구했나요?
"주로 인도 음악입니다. 아일랜드 음악도 들었고요. 일본 전통음악도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음악도 듣고 있어요. 아시아 음악으로는 그 정도예요. 중국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음악도 연구했어요. 그 중엔 살사 같은 쿠바 음악을 특히 좋아하고요. 브라질의 삼바 음악도 좋아합니다."
-동양음악과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다던데요? 자연주의적인 세계관도 있는 것 같고요.
"잘은 모르지만 현대인의 각박하고 바쁜 일상에서 불교는 사람들의 정신적 안식처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 불교는 '지혜의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의 평화에 관심이 많거든요. 가끔 절에 가서 연주를 했었는데 마음의 평안과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절에서 연주하고 싶어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불교 또한 자연에 있으면서 수행과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친화주의와 닮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1인 제작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는 토트네스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려 놓았다.)
"저는 작곡가이면서 연주가이고,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혼자 멜로디를 치고 또 반주 부분을 연주합니다.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가끔 플루트나 필요한 악기 연주자와 같이 녹음하기도 하죠. 제 음악적 감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전체적인 음악 구성을 직접 해서 녹음합니다."
-30장 넘는 앨범을 내셨는데 몇 곡이나 직접 쓴 건가요?
"제가 작곡한 것은 300~400곡이 넘지 싶어요. 그 중에는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쓰인 곡들도 많아요. '골든랜드'는 한국 드라마('푸른 안개')에도 쓰였고요. (자신이 추천하는 곡이 있냐고 묻자) '골든랜드'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비빔밥'도요. 하나는 매우 슬프지만 하나는 아이 같은 감성이 담겼죠. 한국팬들은 '아리랑'을 좋아하더군요. 공연장에서는 특별히 '하바나 카페' 같은 라틴계열 음악이 인기가 있습니다. 상당히 빠른 룸바풍의 쿠바 음악이거든요. 하지만, 이번 공연에는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번 공연은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껏 해보지 않은 거라서 약간의 실패 위험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에게 "생활습관이 상당히 다르지만 음악적으로 통했다"는 가수 이동원과의 작업은 그에게 여전히 흥미롭다. 글래스필드는 이동원의 노래 '향수'를 연주곡으로, 이동원은 글래스필드의 노래 '골든 랜드'에 가사를 붙인 곡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이기에 기대가 더욱 크다고 했다. 두 사람의 '부자연스러운 조화'를 주제로 한 노래도 소개될 예정. 대구 공연은 오는 19일 오후 7시 30분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열린다. 053)624-5586.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크리스 글래스필드는?
1952년 영국 리버풀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음악을 시작해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프로그레시브 록의 황금기에 록그룹을 이끌었다. 대학에 진학해 클래식을 전공하면서 재즈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후 '그랜드 유니온(Grand Union)'이란 그룹을 결성해 클래식 기타의 담백한 선율을 기반으로 폭넓은 퓨전음악을 선보였다. 1982년에는 인도를 비롯한 동양음악에 심취해 연주활동을 돌연 중단하기도 했다. 현재 영국의 자연주의 마을 토트네스(Totness)에 거주하며 연주활동을 하며 작곡, 연주, 제작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치고 있다.
▨ 뉴에이지(New Age) 음악
1980년대 초반부터 나타난 고전(classical)이나 포크(folk) 음악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고루 융합시킨 연주음악이다. 고전음악의 난해함과 대중음악의 기계음을 탈피해 자연의 소리를 표현하고자 한다. 고전·포크음악에 사용되는 어쿠스틱 악기나 신시사이저 같은 최첨단 전자악기로 동양적 신비감과 정적인 분위기를 전달한다. 대표적인 연주가로는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 플루트 주자 폴 혼, 하프 주자 안드레아스 폴렌바이더 등이 있다.
▨ 월드 뮤직(World Music)
단어상으로는 세계의 모든 음악을 말하지만 보통 '제3세계의 음악', 즉 비영어권의 음악을 일컫는다. 사용되는 악기나 멜로디 때문에 이국적이고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CBS의 심영보 PD는 저서(월드뮤직 세계로 열린 창)에서 '각국의 전통음악, 민속음악을 서구 대중음악의 어법을 도입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만든 민속음악'이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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