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언론 세미나 관계로 지난주 도쿄에 머물렀다. 10월 하순임에도 가을 냄새를 찾기 힘들었다. 가을비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았고 높은 습기가 피부에 감겼다. 그러나 날씨보다 더 불쾌한 것은 세계 금융위기로 요동치는 암울한 현실이었다. 기록적인 엔고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본은 엄살인지는 몰라도 바짝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침체를 진단하는 현지 방송에는 '破たん(파탄)'이라는 자막이 수시로 등장하고, 모두들 힘들다는 얘기뿐이다.
바깥에서 국내를 볼 때 눈이 더 크게 떠진다고 했던가. 현지 방송에는 외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관련 보도가 빈번했다. 대구은행의 '달러 모으기' 캠페인이 여기까지 보도되는 것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국민들이 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하는지. 방송을 지켜본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GDP규모가 세계 10위권이고, 2천400억 달러의 외환 보유고가 충분하다고 떠들어대더니 또 궁색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원-엔 환율이 불과 이틀 새 1천500원대로 내려앉았다는 소식에 세미나에 참석한 우리 언론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달러당 90엔을 위협하는 엔고로 일본 니케이지수는 한때 7,000선이 붕괴되는 등 일대 혼란을 겪고 있다. 주가가 26년 전의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큰 동요는 없었다. 차분하게 대응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는 일본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이 시장의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일까. TV 생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여야 의원들과 전문가들이 격론을 벌일지언정 아소(麻生) 내각을 나무라는 언론이나 국민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었다. 자민당은 연내 2조 엔(약 28조 원) 규모의 정액 감세를 추진 중이다. 또 재정투자 확대나 고속도 통행료 감면 등 실물경제 악화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중의원 해산에 촉각이 곤두선 시점임에도 TV에 비친 아소 총리의 행보는 단호해 보였다. 이례적으로 도쿄시내 할인점을 찾아 시민들과 물가에 대해 얘기하고 만두 시식도 하는 모습에서 '내 할 일은 알아서 하겠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문제는 의회 해산이 아니라 경제위기 해법이 먼저'라는 아소의 행보에 일본인들은 잠시나마 불경기의 근심을 잊지 않았을까.
위기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고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려 한국과 일본 정부가 내놓는 대책 하나하나가 중요한 때다. 우리 정부도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는 강력한 대책들을 적절하게 내놔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책을 보면 빠른 볼을 던져야 할 타이밍에 슬라이더나 포크볼을 던지다 기다렸다는 듯 된통 얻어맞는 꼴이다. 정부가 금융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석해 제대로 대처한다면 시장의 신뢰를 잃을 일도, 지금처럼 투기세력이 설칠 일도 없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기획재정부 장관 등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흔들리니 시장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고도 대통령은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단언코 외환위기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같은 위기를 맞은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신감의 차이로 보였다. 일본은 여야당 모두 의회 해산과 총선거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지만 금융위기와 엔고 대책에 더 주력하는 모습이다. 반면 한국은 정쟁으로 집중력이 분산된데다 경제팀의 오락가락 정책에 악성 루머들이 판을 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이 받고 있다. 금융위기가 설령 외풍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울타리를 넘어 들이닥쳤다면 더 이상 외부 탓만 할 일이 아니다. 막을 방도부터 강구하는 게 우선이다. 이를 제대로 못해 난리법석인데도 지도자들이 고집만 부리고 있으니 지지율이 바닥이라도 할 말이 없다. 지도자는 민심을 다독이고 불안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당장 뭘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멀쩡한데 뭘"이라고만 외친다면 정치력과 자질만 의심받게 된다. 최근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듯 지도자의 리더십에 더 이상 국민이 반응하지 않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면 민심부터 살피라는 말이 있는 게다.
서종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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