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좋은 사과는 팔고, 흠집 난 사과는 우리 몫

어린 시절 나는 사과나무와 함께 자랐다. 과수원의 봄은 꽃구름을 이뤘고, 여름은 셀 수 없는 공이 들어갔고, 가을은 풍성한 결실이 있어 좋았다. 가을날 아침이면 이슬 맺힌 사과를 따먹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두고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마음에 드는 사과를 따 담는다. 궤짝을 엎어놓고 앉아 배가 부르도록 먹고는 해질 녘에야 집으로 들어오곤 했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서는 사과가 바로 가정 경제의 수단이었다. 그것이 형제들의 학비였으며 가족들의 생활비이고 삶의 기반이었다. 그런 만큼 식구들이 평상시에 먹는 것은 상품성이 떨어지는 흠다리 사과여야 한다는 암묵적인 원칙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그것을 잘 지키지 않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머금은 사과, 그 촉촉함을 손으로 느끼며 빛 받아 발그레한 볼을 깨물어 먹는 행복감을 무엇에 비유할까.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맛, 그 기분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에 자주 듣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과 하나에 사람 손길이 얼마나 가야 하는지 알겠니. 농사지을 때 힘든 것 생각하면 썩은 사과 하나라도 그저 주지 않을 거야"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가 가슴 속 깊이 스며든다.

길안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과일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사과 한 상자가 배달되었다. 약간씩 흠이 있지만 맛은 좋아 보였다. 탐스럽게 잘 익은 것들만 골라 따먹던 나는 오늘 이렇게 흠다리 사과 상자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벌레 먹고 터지고 찢겼어도 가을이 될 때까지 버티어 온 것만도 장하지 않은가. 사과 상자 속에서 비바람이 스쳐 간다. 해충과 싸우는 지친 농부의 얼굴도 스친다.

나는 지금도 그곳에 가고 싶다. 흠다리 사과라도 좋으니 내 손으로 따 보고 싶다. 나와 같이 늙어 있을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이정기(대구 달서구 상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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