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복식은 고려의 역사 자체를 은폐하려했던 조선의 정책 때문에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진 않지만 고대 문헌에 따르면 3기로 나뉜다. 이를 드라마와 연계해 풀어보자.
드라마 '태조 왕건'은 후삼국으로 분열된 한반도를 재통합해 고려제국을 세우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무력으로 굴종시키기 보다는 덕으로서 적대세력을 포용해 건국을 이루는 과정을 그렸다. 이때는 건국의 시기이므로 체제가 안정되지 않아 의복은 신라 말 복식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신라복식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의상들을 선보였다.
'제국의 아침'은 왕건의 스물아홉명의 비와 많은 소생으로 인한 피비린내나는 왕위 쟁탈전을 그린 드라마로, 제4대 광종조의 이야기이다.
이때가 제1기로 오대·송의 영향을 받은 시기다. 광종조 때 4색공복제도를 정하여 관직에 따라 자(紫)·단(丹)·비(緋)·녹(綠)을 달리해 입었다. 이때부터가 고려복식의 실제적인 전환기로 보인다. 이는 제22대 광종 원년까지 지속됐으며, 제2기는 원의 침략으로 몽고복식이 영향을 받은 시기이다.
드라마 '무인시대'는 1170년 보현원의 참살을 시작으로 100년동안 고려를 통치한 무신 정권의 이야기. 정변과 민란이 들끓고 몽고와의 항쟁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맞았던 시기. 남자복식은 변발호복을 받아들였고 친원파의 관료와 지식층은 공복을 입었으며 서민층의 백저포는 남녀노소 공용으로 이었다. 여자복식은 우리 고유복식의 기본형에 몽고복식의 일부가 가미됐으며, 머리에 몽수를 쓰고 두루마기나 치마에 두른선이 없어졌다. 길이가 짧아져 고름을 달았던 저고리는 이 시기에 더욱 짧아졌다.
치마는 폭이 넓고 길었으며 선군이라는 속치마를 여러 겹 입어 치마폭을 퍼지게 했고 선군위의 겉치마는 길어서 걸을 때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한다. 바지는 통이 넓은 관고를 속바지나 겉옷용 바지로 입었다. 의례복은 족두리·가체·도투락댕기·장도 등을 착용했다.
두루마기는 남자두루마기와 비슷한 백저포에 허리띠를 맸고 띠에는 금방울과 향낭을 찼는데 그 수로 귀천을 나타냈다.
저상은 왕에서 서민까지 입었던 저고리 종류로 여름에는 모시, 겨울에는 비단으로 지어 입었으며 손끝이 보이지 않도록 손을 가렸다.
명의 영향권에 들었던 제3기는 문익점에 의해 목면이 전파되면서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복식의 전환기가 되었다.
드라마 '신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승복. 인도의 '카사야'에서 비롯된 가사가 나타났고 동방으로 보여지는 옷을 청·적·황·백·흑 이외의 색으로 지어입었다.
고려복식에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주로 귀족, 왕족의 의복이고 서민 복식은 우리 고유복식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넓어진 바짓가랑이, 짧아진 저고리, 넓은 치마폭 등 세부적인 변화가 있었을 뿐이며 이는 전체적으로 복식의 아름다움이 강조된 것으로 복식미의 진일보를 이룬 시기이다. www.한복의미.com, 010-2501-2020. 손미영
댓글 많은 뉴스
[단독] 예성강 방사능, 후쿠시마 '핵폐수' 초과하는 수치 검출... 허용기준치 이내 "문제 없다"
[르포] 안동 도촌리 '李대통령 생가터'…"밭에 팻말뿐, 품격은 아직"
李 대통령 "검찰개혁 반대 여론 별로 없어…자업자득"
이재명 정부, 한 달 동안 '한은 마통' 18조원 빌려썼다
김민석 국무총리 첫 일정 농민단체 면담…오후엔 현충원 참배·국회의장 예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