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53년간 대구경북서 헌신의 삶…佛로 떠나는 길젤라 신부

"오히려 제가 받은 사랑에 감사합니다"

3일 오전 11시 계산성당(대구시 중구 계산동)에서는 의미있는 미사가 열렸다. 프랑스 길젤라(78·스타니슬라오) 신부의 송별미사였다. 이날 300여명의 사제와 신자들은 평생을 천주교 대구대교구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사랑과 열정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길젤라 신부는 내년 초 고국인 프랑스로 떠난다.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이제 53년이 지나 백발의 나이로 임무를 마치고 대구대교구를 떠나는 것이다.

"떠난다니 섭섭합니다. 그러나 참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파리외방전도회 소속 마지막 사제이다. 파리외방전도회는 아시아 포교를 위하여 프랑스에 설립된 가톨릭의 해외 전도단체다.

가난하지만 독실한 가톨릭집안에서 자란 그는 1955년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전쟁으로 피폐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으로 결정됐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프랑스 북부 아미엥에서 태어났지만 조국은 폴란드이다. 옛소련과 독일의 등쌀에 시달리던 조국과 한국의 처지가 비슷한 때문이었다. 서울 용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대전교구 소속으로 충남 예산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 포항으로 오면서 대구대교구와 인연을 맺었다. 30년 먼저 한국에 온 루이 데랑드(한국명 남대영) 신부의 요청 때문이었다. 예수성심시녀회 창설자인 데랑드 신부는 당시 포항 송정에서 전쟁고아 300여명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 60여명, 한센병 환자를 보살피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하자 그를 부른 것이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할 때였죠. 미국원조를 받은 밀가루와 우유가루, 헌옷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1967년 포스코(옛 포항제철)가 건설되면서 보금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작은 치료소를 직접 짓기도 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안동교구청과 울진 성당 등을 직접 설계했다. 대구가톨릭병원이 건축될 때는 설계 자문을 맡기도 했다.

자인본당 주임신부로 사목의 일선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힘든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많은 열정을 바쳤다. 또 초대 대구대교구장인 프랑스 드망즈(안세화) 주교의 사료를 번역하는 등 교구사 편찬에도 기여했다.

그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다. "공소에서 시골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먹고, 생활하던 기억이 내 생애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을 사랑한 사제였다. 고향으로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했다. "가톨릭의 원뜻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보편성'"이라며 "그렇게 볼 때 하느님이 계신 곳이 바로 내가 있을 곳"이라고 했다.

고향에 가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기도만 하겠다"고 말했다. 평생을 이 땅의 힘든 이들을 도왔던 그의 마지막 인사말은 '감사'였다.

"낯선 외국인인 저에게 그토록 깊은 사랑을 나눠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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