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선택은 뭘까? 영화 '소피의 선택'(1982년)에서 소피(메릴 스트립)가 처한 선택의 갈림길일 것이다. 유태인 수용소로 가는 도중,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소피를 보고 한 독일군 장교가 치근댄다. 그녀가 유태인 같지 않고 아리안 전형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금발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장교는 선심을 쓰듯 그녀에게 딸과 아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가스실로 보낼 아이를 스스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두 아이 모두를 죽이겠다는 압력에 소피는 딸을 선택한다.
'선택하지 않게 해달라'(Don't make me choose)고 애원하다가, 결국 독일군에게 안겨 멀어지는 딸을 보며 오열하는 소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어머니는 스스로 자식의 '살생부'를 적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살아남아서도 평생을 고통 속에 보낸다.
'살생부'는 죽이고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둔 명부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을 반대할 만한 신하들을 죽이기 위해 작성한 명부이다. 이름이 올랐던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이조판서 조극관, 좌찬성 이양 등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이를 주도한 이가 바로 칠삭둥이 한명회이고, 이 난이 계유정란이다.
연초부터 명예퇴직, 희망퇴직, 구조조정 등 '살생부'가 난무하고 있다. 직장인들은 혹 '선택'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건설업체에서는 구조조정 대상 발표를 앞두고 최종 결정도 않은 명단이 나돌면서 평가기준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등 '살생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살생부가 갖는 광기와 잔혹성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것이 '데스노트'이다.'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은 오바타 다케시의 원작만화다. 흥미로운 것은 얼굴을 모르는 이의 이름을 쓰면 효과가 없다는 룰이다. '또 다른 가족'이란 이름 아래 뭉쳤던 같은 조직 내에 떠도는 살생부와 흡사하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에 있는 초콜릿과 같아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맛과 결과도 달라진다'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대사와 달리, '너는 자유다. 스스로 선택하라'는 사르트르의 말도 무색하게, '소피'에게 선택당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현실. IMF 외환위기 이후 또 한 번 휘몰아치는 '살생의 계절'이다.
김중기 문화팀장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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