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림은 가장 원초적인 음악 언어다. 인간의 감성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풍물놀이는 원초적 두드림을 화려하게 변주한다. 때로는 바람보다 빠른 휘모리로 몰아치다가 흥겨운 굿거리로 어깨춤을 끌어낸다. 풍물가락이 퍼지면 슬픔이나 절망은 저 멀리 날아간다. 풍물놀이의 마에스트로는 상쇠. 상쇠의 가락에 풍물은 뜨고 진다. 상쇠는 풍물 중 가장 자극적인 소리를 내는 꽹과리로 장단을 조절하고, 변주를 끌어내며 놀이를 매조지한다.
강순연(84) 대구앞산이화농악단 원장은 국내 최고령 상쇠다. 12세때부터 상쇠를 했다니 벌써 70년이 넘었다. 그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상모를 돌리며 360도 회전을 연거푸 해낸다. 14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동 농악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지하사무실 바닥은 발가락이 움츠러들 정도로 시린 냉기로 가득했다. 목을 까딱이는 전열기에 의지해 인터뷰를 이어갔다. 다소 왜소한 체격의 청각장애 5급인 강 원장은 보청기가 없이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흥겨운 자진모리 장단처럼 쾌활한 사람이었다.
◆글은 질색인데 매구는 타고났어
그는 "글에는 영 재주가 없었지만 민속놀이는 타고났다"고 했다. 재주가 없는 건 글 뿐만이 아니다. 돈 버는 재주도, 약은 꾀를 쓰는 재주도 없었다. 삶은 고단했다. 열두살 때부터 직업은 '머슴'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잣집 소를 먹일 꼴을 베다 주고 세끼 밥이나 얻어먹는게 고작이었다.
가난을 업으로 여기던 그 때, 소년을 사로잡은 건 풍물이었다. 정월대보름 어른들이 지신밟기를 하며 풍물을 치면 '캥캐갱캐 캥캐개갱' 손장단, 입장단을 냈다. 부잣집에서 쓰다 버린 양철 쪼가리로 꽹과리, 징, 북, 소고를 만들어 두드려댔다. 소나무 가지를 잘라 상모를 만들고 냇가에 늘어진 양버들로 삼색띠를 만들어 묶었다.
"일정시대라 일본인들이 풍물을 못치게 했어. 도망다니고 온갖 구박을 받아가며 쳤지. 그 걸 치고 있으면 어른들이 '어린애가 참하게 친다'며 신기해했지."
경남 합천군 적중면 월막리. 마을 농악단 상쇠 정무학 선생이 그를 보며 '타고난 소질이 있다'며 어여뻐했다. 그는 정무학의 꽹과리 가락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뼛 속 깊이 각인시켰다.
민속놀이에는 귀신같던 그도 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그때는 머리 땋고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던 시대거든. 글을 배우러 가면 영 젬병이라. 훈장이 대여섯번 가르쳐주다가 모르면 물고 있던 곰방대로 머리를 딱 때리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울면서 '덧정없다' 그러고는 와버렸어. 하하하." 다행히 한글을 잘 알던 아버지 덕분에 낱글자로 물어가며 한글은 익혔다. "야학을 다닐 때도 맨날 뒤에 앉아서 손 한번 못들어 봤다카이. 아는 사람 손 들라는데 뭐 아는게 있어야지. 글에는 그렇게 소질이 없었어."
열일곱살이 되던 해, 그는 놋으로 된 '진짜' 꽹과리를 잡았다. "내가 안나가면 동네에 매구 칠 사람이 없어서 풍물을 못했다카이. 저녁밥 숟가락도 놓기전에 동무들이 와서 매구치러 가자고 난리였지. 한 마을에서도 아래뜸, 윗뜸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고구마나 떡, 감자를 간식거리로 주면서 꾀었지."
열아홉살이 되던 해 해방이 됐다. 눈치 보지 않고 풍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절이 됐다. 그는 해방 전 만주까지 다니며 풍물 공연을 했던 형과 함께 전국 풍물대회를 휩쓸었다. 대구, 현풍, 구지, 창녕, 부산 등 지역 대회마다 마을 농악단으로 참가해 숱하게 우승도 했다. 20대는 정말 날리던 시절이었다.
◆평생을 남의 집살이 하며 떠돌았지
그가 내민 복지카드에는 주민등록상 출생연도가 1923년으로 돼 있다. 올해로 87세가 된 셈. 하지만 그의 나이도, 이름도 본디 그의 것이 아니다. 어렸을때 세상을 떠난 세 살 위 누나의 이름과 주민번호다. "내 본 이름은 강수복이라. 아버지도 글을 모르이 마을 이장에게 출생신고, 사망신고를 부탁했는데 이장이 잘못 알아듣고 뒤바꿔서 신고한기라.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되고,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이 됐다카이." 어둑하던 시절 심심찮게 벌어지던 일이라 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뒤바뀐 사실은 스물 여섯살에 혼인신고를 할 때서야 알았다. "혼인 신고를 하러 갔는데 '여자끼리 어떻게 결혼이 되노' 그래가 알았는기라. 성별은 바로 잡았는데 이름을 바꾸려면 재판을 해야한다고 하더라꼬. 이게 다 글을 못 배운 탓이라."
뒤바뀐 이름은 삶의 궤적도 틀었다. "여자로 돼 있었으니 일정 때 징병을 면했고, 근로보국대에 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지. 중간에 묘하게 걸쳐서 피할 수 있었던거지." 그가 내민 왼손 엄지손가락은 끝마디가 거의 잘려 손톱 밑만 남아있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뿌리는 휘어진 채 내려앉았다. 열아홉 살 때 작두 날에 다친 상처. "동짓날 초엿새날, 날도 안 잊어버린다. 여물을 만들려고 작두로 짚을 썰고 있는데 장난이 심했던 친구가 발로 훅 밀었어. 작두날에 찍혀 손가락이 못쓰게 됐지." 다친 손가락은 6·25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경북 청도에서 피난 생활을 했는데 매일 징병한다꼬 동네 청년들을 다 데려갔거든. 근데 검지가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인데 나는 안 구부러지니까 징병관이 '에잇! 집에 가라' 그러더라꼬."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동네는 거의 불탔고, 악기도 농악단도 풍물대회 우승기도 재가 된 지 오래였다. 입에 풀칠도 못하는 고향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래도 걸출한 상쇠가 오니 가는 동네마다 농악단이 일어났다. 60대까지 경상도 일대에서 15곳 이상 거처를 옮겼고, 창녕군 대합면 농악단, 합천군 율곡면 갑산농악단, 고령군 쌍림면 안립여자농악단, 대구범어농악단, 창녕군 이방면 구학농악단 등 9곳 이상에 농악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했다. 머슴이 사라지면서 그는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지금 그는 전세 700만원짜리 단칸방에 아내와 둘이 산다. 자식도 없다. "평생을 떠돌아다녔으니 무형문화재가 안됐지. 창녕군에 물어보니 내가 뿌리가 없고, 제자가 없어서 안된대. 한 곳에 있었으면 벌써 30~40년 전에 무형문화재가 됐을끼라." 기록도 소실되고, 전수자도 떠돌았으니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긴 어려웠을게다.
◆이화가락은 깨알처럼 자글자글해
매주 월·화·금·토 4일간 대구 남구 대명동 대구앞산이화농악단에서 수강생들에게 풍물을 가르친다. 대구는 팔십 평생 가장 오래 머문 곳이다. 1997년 8월 구학농학단에서 부쇠로 있던 이가 앞산 인근에 사무실을 얻어줬고, 그 길로 대구에 정착했다. '앞산'은 대구에 처음 자리를 잡은 터이고, 이화는 창녕군 이방면에서 따왔다. 가락의 뿌리는 경남 창녕에 두고, 꽃은 대구에서 피운다는 뜻이다.
300년 전통 풍물인 정무학의 13가락에 자신이 창안한 3가락을 더해 16가락을 만들었다. 그 만의 독특한 악보도 완성했다. 또박또박 한글로 '깽깨갱깨, 쿵덕쿵덕'을 오선지에 적은 악보는 박자와 북, 장구, 소고 등 다른 악기의 박자가 맞닿아있다.
"이화가락은 가락 자체가 굉장히 달라. 다른 풍물은 보통 너댓 가락으로 반복하면서 30여분을 치는데 우리는 전부 다른 가락으로 친다고. 다른 풍물을 아무리 잘쳐도 여기 오면 새로 배워야돼." 이화가락은 가늘고 빠르다. 그의 표현대로 가락이 '자글자글'하다. "정무학 선생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뒤 내 식으로 재창조를 했으니 상당히 다르지."
그는 제자들을 속성으로 가르친다고 했다. 혹시나 '안 물려주고 죽어버리면 썩혀 내버릴까봐'다. 대회에 입상하면 제자도 더 받고 무형문화재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팔순을 넘긴 나이에 대회도 출전했다. 2005년 남사당 바우덕이축제 전국풍물대회에서 개인 일반부 은상, 단체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은상을 받고는 얼마나 기분이 나쁘던지. 그동안 비용이 없어서 출전을 못했는데 올해는 다시 나가보려고해요. 풍물놀이는 40명이 정원인데 아무나 데리고 가서는 안되거든. 또 거의 50대를 넘긴 일반부 회원들이 상모를 돌리고 뛸 수가 없다고. 젊은이들이 아니면 우승하기 힘든기라."
민초들의 시름을 더는 한바탕 굿판이었던 풍물놀이가 축제의 양념처럼 박제화되고 밀려난 현실에서 그가 전수자를 많이 만나긴 힘들어 보인다. 풍물을 가르치는 그의 사무실을 찾는 수강생의 발길도 줄어간다. 1980, 90년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불었던 풍물 바람도 불황 앞에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양로원이나 복지관, 요양원을 다니며 무료 공연도 한다.
◆풍물은 내 인생의 전부라
풍물을 안했다면 어땠을까. 그저 고향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지긋이 살았으면 그렇게 팍팍하게 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배운 것도 없고, 다른 기술도 없으니 돈이 붙을 리는 없고, 내 팔자는 민속하며 살다가 가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그도 3년 전 학원을 정리하려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아내는 "한평생 민속을 놀았다는 사람이 심심해서 어떻게 견디겠냐"는 만류도 내쳤다. 그런데 막상 '계약하겠다고 연락할까요?'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팔면 죽는다. 파는 순간, 내 인생은 끝나는거다 싶더라고요. 아무리 힘이 빠지고 처졌다가도 꽹과리채만 잡으면 힘이 번쩍 나요. 내 목숨이나 다름없지."
떨칠 수 없던 가난과 떠돌이 생활은 분명 그에게도 가혹한 과거였다. 후회도 많았다. "가난해서 고통받는게 말도 못하지 뭐. 설움도 많이 받았고. 왜 나한테만 돈이 안붙을까 생각도 했는데 내가 생활을 잘못한 것도 있어."
풍물이 쇠퇴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 "악보하나 없이도 5박을 맞춰내는게 우리 악기인데 풍물은 농촌에서나 하지 도시에서는 안한단 말이야. 그런데 요즘 농촌은 영감 할매들만 지키고 있으니 풍물이 일어날 수가 없다카이. 사물놀이가 너무 퍼지니까 오히려 풍물놀이는 작아지는기라. 풍물은 정원이 40명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
팔십 평생이 아쉬운 건 고단했던 삶 때문만은 아니다. 후학들에게 이화가락을 이어가고, '무형문화재'로 명예를 찾는 두 가지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한 탓이다. 그에게 '만약 5억원이 있다면 무얼 하겠냐'고 물었다. '단칸셋방을 면하겠다'는 대답을 기대했던 기자에게 그는 '무료 강습'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내 힘으로 중·고·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 강습을 해서 내 기술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 제자들로 풍물패를 만들어서 전국 풍물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는거지. 또 서울 여의도나 부산역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질펀하게 풍물놀이를 하고 싶어. 또 양로원, 복지관, 요양원 같은 곳에 무료 봉사도 다니는거예요. 그런 돈이 있으면 참 좋겠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강순연 할아버지는?=1926년 경남 합천군 출생. 12세 때부터 월막리 농악단 상쇠 정무학의 가락을 체득했다. 무학에 가난했던 탓에 평생 이곳저곳 떠돌며 창녕군 대합면 십이리농악단, 합천군 율곡면 갑산농악단, 대구범어농악단, 창녕군 이방면 구학농악단 등의 상쇠와 단장을 맡았다. 1997년 대구앞산이화농악단 원장으로 대구에 터를 잡으며 정무학의 13가락에 자신이 창안한 3가락을 더해 이화가락으로 이름지었다. 1983년과 1985년 삼일민속문화제 농악대회 특기부문 1등, 2005년 안성남사당바우덕이축제 전국풍물대회 개인 일반부 은상, 단체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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