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5시 30분쯤 대구 서구 비산동 원고개시장 앞. 일용직 건설노동자 20여명이 모닥불에 몸을 녹여가며 서성대고 있었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으러 나온 50, 60대 남성들이었다. 이 중 5명만 일하러 간다고 했다. 미리 연락이 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요즘 일용직 건설노동자를 위한 새벽 인력시장은 아예 열리지도 않는다. 건설공사 현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일손들은 모닥불에 손을 쬐며 2시간 남짓 기다리다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한 60대는 "40년 넘게 공사장 밥을 먹었는데 IMF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무작정 집에 있을 수 없어 나오긴 했는데…"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또 다른 60대는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일한 날이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원래 겨울에 일거리가 없긴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더 안 좋을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4천명이 길바닥에 나앉을 지경=건설·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기면서 건설노동자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일용직 건설노동자는 물론이고 건설업체 도산 등에 따른 임금 체불까지 늘면서 건설 실업자가 속출하고 있다. 일이 없으면 거리로 향하는 '반(半)노숙자' 처지의 일용직 건설노동자도 상당수다.
이 때문에 건설업계와 노조에서는 관급공사 조기 발주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아우성치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전국건설노조 대구경북지역본부 장진규 본부장 등 간부 4명이 대구시청을 방문했다. 이들은 대구시의 관급 공사 발주 시기를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다. 건설노조 대구경북본부 측은 "지난해 가을부터 일거리가 없었는데, 이번 봄까지 없다면 건설노동자들은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라며 다급함을 호소했다.
노조 측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건설경기 악화로 대구에서만 1만명에 가까운 실업자들이 양산됐다고 했다. 가령 1천가구를 짓는 아파트 공사장의 경우 철근, 미장, 전기, 골조 등 24개 직종이 공동 작업을 하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건설노동자는 200~300명에 이른다. 지난해 가을부터 현재까지 공사가 중단된 곳만 20여곳이 넘고 현재 공사 진행 중인 현장은 10곳이 채 안 된다. 4천여명의 건설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북부정류장 인근에서 만난 건설노동자 이모(48)씨는 "지방이라도 일하러 가고 싶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다"며 "이대로 봄까지 일거리가 없으면 쪽방에서 쫓겨나 노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숨지었다.
건설노조 대구경북본부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합원 2천여명 중 30%인 600여명만이 '일하고 있다'고 했고 나머지는 실직 상태에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일반건설업체의 대구지역 건설발주액(통계청 11월말 현재 자료)은 1조5천813억원으로, 전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월별로 살펴봐도 2007년 10월과 11월은 각각 2천793억원, 1천392억원이었지만 2008년 같은 달에는 각각 833억원과 412억원에 불과했다.
◆전망은 더 어둡다=건설 노동자들의 임금체불도 심각한 상황이다. 일을 하고 난 뒤 3개월여가 지나야 월급을 주는 속칭 '쓰메끼리'(임금유보)라고 불리는 건설업계의 관행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건설노조 대구경북본부에 접수된 임금체불장만 64곳이나 된다. 3개월치 임금이 밀린 탓에 체불액은 10억원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라는 게 노조 측의 분석이다.
대구시도 오는 상반기 중 관급 공사를 앞당겨 발주하는 방안을 세우고 있다. 시는 14일부터 '비상경제상황실'을 꾸려 지역 건설 위축에 대해 올해 있을 공사의 90% 이상을 상반기에 조기 발주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시 건설관리본부에서 발주 예정인 총 109건의 공사 중 100건 가까운 공사가 발주된다.
하지만 이 정책이 시름에 빠진 건설업계에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해부터 시작해 2011년 7월에 마무리될 예정인 '이현펌프장~금호택지 진입 교량·도로 공사' 경우 480억원의 대규모 공사이지만 올해 분량은 100억원 남짓이라 큰 기대를 갖기는 어렵다. 관급 공사 대부분이 도로·교량 등에 한정돼 있어 업계에서는 이마저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나머지 관급 공사는 금액이 적고 주로 토목 현장이다 보니 직접 고용효과는 높지 않다.
건설노조 대구경북본부 문정우 사무국장은 "도로를 만드는 데 목수나 철근 담당 노동자들은 크게 필요치 않아 관급공사가 있더라도 일부만 고용될 것"이라며 "하지만 이마저도 없다면 모두 굶어야 할 정도로 극한 상황"이라고 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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