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명절 선물, 모호한 경계의 줄타기

선물 줬는데 "뇌물"…뇌물 받고도 "선물"

해마다 명절이 되면 선물이 홍수를 이룬다. 이는 주고 받는데 익숙하고 융통성이 있는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나 즐겁고 긍정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인 선물이 간혹 부담스럽거나 난처한 경우도 있다. 특히 '업무상 선물'은 과하면 뇌물로 오인받고 너무 약소하면 하찮은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선물과 뇌물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명절을 앞두고 벌어지는 선물과 뇌물의 줄타기를 살펴봤다.

◆선물 혹은 뇌물

선물과 뇌물의 구분이 가장 애매한 곳은 관공서다. 소소한 감사의 표시도 '뇌물'로 취급받을 수 있고, 자칫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절을 앞두고 중앙부처와 지자체에 설치된 클린신고센터에는 공무원에게 건네진 선물 처리방법을 두고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상품권이나 현금도 있지만 대부분 '선물'로 여겨질 법한 과일이나 양주 등이 대부분이다. '잘봐달라'는 뻔한 의도보다는 '잘 처리해줘 고맙다'는 사후 감사 표시가 많다.

대구경북지방병무청 고객지원과에 근무하는 하모(32·여)씨는 최근 낯선 등기 우편을 받고 깜짝 놀랐다. '민원 처리를 친절하게 해줘 감사하다'는 내용과 함께 봉투 안에는 호텔 숙박권과 스파 이용권이 들어있었던 것. 그제서야 하씨는 병역 미필자인 자녀가 국외여행허가를 받으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문의했던 민원인을 떠올렸다. 하씨는 14만원 상당의 호텔 이용권을 병무청 클린신고센터에 신고했고, 호텔 숙박권은 민원인에게 우편으로 반환됐다.

오랜 인연으로 선물을 보내온 경우도 있었다. 다른 직원 A씨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로부터 현금 10만원이 동봉된 통화 등기를 받고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곰곰이 기억을 되살려보니 8년 전 일이 떠올랐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병역증명서를 발급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자세히 조회해 회신해줬던 일이 생각났던 것. 민원인은 A씨가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갔다가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을 알고 '식사나 하라'며 현금을 보냈던 것.

대구경북지방병무청에 따르면 지난해 직원들에게 건네졌다 클린신고센터로 신고된 선물은 6건. 물품은 난 화분이나 수입양주, 상품권, 건강음료 등이었고 가장 비싼 선물은 수입양주로 시가 18만원 상당이었다. 병무청 관계자는 "감사의 표시로 우편으로 선물을 보내거나 자리에 던져놓고 가기도 한다"며 "공무원 행동강령에 3만원 이상의 선물은 받지 못하게 돼 있기 때문에 감사실을 통해 신고를 한 뒤 전부 반송하며 택배나 우편 비용은 병무청에서 부담한다"고 말했다.

뇌물인지 선물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금품을 뜻하지 않게 받았다가 돌려줄 길이 막막해진 경우도 있다. 대구 수성구청 광고물 관리계 한 직원은 지난해 9월 자리에 놓인 10만원 권 수표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광고물과 관련한 상담을 나눈 민원인이 자신도 모르는 새 수표를 두고 떠났던 것. 돌려줄 길이 없었던 수표는 한달 간 구청 홈페이지에 찾아가라는 공고를 한 뒤에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구 금고에 보관해 놓은 상태다. 이처럼 준 사람이 명확할 경우 본인에서 돌려주지만 상대가 누군지 모를 경우에는 신고를 한 뒤 일정기간 동안 찾아가도록 공고를 하고, 그래도 찾아가지 않으면 세외수입으로 처리한다.

노골적인 뇌물 요구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음주 교통사고를 낸 직장인 A씨(33)가 그런 경우. 새벽까지 회식을 하고 술이 덜 깬 채 오전에 출근을 하다 사고를 낸 A씨는 인사사고에 음주측정까지 거부해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A씨는 사고 조사를 맡은 경찰관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했고, 사고 처리가 끝난 후 담당 경찰관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A씨는 "만나자는 의도가 뻔한 것 같아 현금 20만원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며 "찜찜하긴 했지만 의도를 아는 상황에서 그냥 무시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정성이 담긴 맞춤형 선물도 효과 만점

선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세심하고 꼼꼼한 선물은 인간 관계에서 충분한 호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모(47)씨는 명절 선물로 미술품을 선호한다. 양주나 갈비세트와 비슷한 가격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고, 고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 주로 50만원 전후로 나름대로 알려진 작가의 소품을 고른다는 것. 이씨는 "100만원이 넘는 작품은 서로 부담이 될 수 있지만 50만원 미만의 미술 소품은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받는 사람의 품위도 올려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모(38)씨는 남몰래 직장 동료들의 명절 선물을 챙겨주는게 특징이다. 직장 상사나 후배들을 1대 1로 만나 상품권을 건네는 것.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도 전해줄 수 있는데다, 다른 동료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피할 수 있다는게 박씨의 설명. 직장 상사들의 신임을 받고 인맥 관리를 하는데 필수라는 것이다.

꼭 비싼 명절 선물이 아니어도 선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P(36)씨는 상사나 부하의 가족을 챙기는 편이다.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현지 특산품을 구입해 챙겨 주는 것. 형식적인 냄새가 나는 명절 선물은 오히려 피한다. 상사의 경우 가족들의 취향을 고려하고, 후배 자녀들의 학용품을 챙겨주는 것도 노하우. P씨는 "현지 시장이나 소품 가게에서 구입하는 특이한 물품을 반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며 "비싼 돈을 들이는 대신 맞춤형 선물을 사다 주는 것이 생색을 낼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다.

선물과 기부가 좀 더 활발해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계명대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는 "서구의 경우 기부를 전체 공동체에 기부를 하지만 한국 사회는 혈연·지역 공동체에 기부를 아끼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반드시 선물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부와 선물의 경제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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