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상호의 시사 코멘트] 설날 斷想

오늘은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설 연휴의 실질적인 첫날이다. 이미 고향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때만큼은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느끼던 평소의 짜증도 고향 찾는 설렘에 스르르 사그라진다. 의미가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설날을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한 말이 새삼 실감나는 때다.

이번 설날은 양력 채택 후 100여 년간 수난을 당하다 1989년 복권되고 스무 번째 맞는 설날이다. 스무 번째라고 하니 예년과 달리 남다른 감회가 든다. 설날 복권 당시 대학원에서 과학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오래 전부터 설날 복권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분이었다. 설날이 복권되자 일생의 소원 가운데 하나를 이뤘다며 무척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면 '이중과세'가 얘기되던 그때 아이들은 새해가 되면 무조건 좋았던 것 같다. 우선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때문이었다. 신정(신식 설날)이라 해서 양력 1월 1일에는 집에서 세뱃돈을 받고 구정(구식 설날)이라 불린 설날에도 큰집에 모인 친척들로부터 세뱃돈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을까.

나이를 조금 먹어서도 세뱃돈 챙기는 재미는 여전했지만, 이전과 달리 새벽같이 큰집에 모여 차례를 지낸 뒤 서둘러 떡국을 먹고 별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이 모두 직장으로 학교로 흩어졌다. 설날이 공휴일이 아니다 보니 직장에 나가고 학교에도 가야했기 때문이다. 이중과세마저 용납하지 않은 정부가 설날을 없애려고 아예 공휴일에서 빼버렸던 것이다.

설날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것은 머리에 먹물이 제법 들고 나서다. 일제가 '문명개화' 운동이란 미명하에 우리의 설날을 어떻게 없애려고 했는지, 신정'구정이란 말이 왜 생겨났는지, 광복 후 그 악령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설날이 왜 복권되어야 하는지 등을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

설날이 가까워지니 인터넷에도 설날 관련 얘기가 많이 떠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얘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설날이 그 시대의 역법에서 첫날을 의미했던 것이니 지금의 역법인 양력에 따라 1월 1일을 설날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날을 역법 채택의 문제로만 보아야 하는지, 참으로 딱한 일이기는 한데,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 걱정도 된다.

지금 전 세계가 양력을 쓰고 있으니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양력을 쓰고는 있지만, 양력에 비해 음력이 더 과학적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실상만큼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때 음력이 계절에 맞지 않는다 해서 양력이 더 과학적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통역법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음력이란 정확히는 태음태양력이다. 양력이 해의 운동만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반면 태음태양력은 달과 해의 운동을 함께 나타낸 역법이다. 즉 달의 운동을 날짜로 나타내고, 태양의 운동은 24절기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24절기가 음력의 양력 성분인 것이다. 그러니 날짜로 계절을 맞추려 하면 틀릴 수밖에 없는데, 이를 오해해서 한때 양력이 더 과학적이라 했던 것이다.

설날이란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는 해나 달이 어떤 시작점에 있을 때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양력의 1월 1일은 아무 의미가 없고, 어떤 자연현상을 기준으로 한 새해의 시작도 아니다. 반면 설날은 달이 새로 생겨나는 그런 날이다. 새로 시작되는 자연현상에 비추어 우리의 생활도 새롭게 해보자는 뜻이다.

어찌되었건 설날이 되었으니 지난해의 묵은 때를 털고 정말 새롭게 한해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지난 한해는 정말 힘들게 지나갔고, 올 한해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정부는 무엇이든 조급하게 이루려 했고, 원인이 어디에 있든 설날을 앞두고 큰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중국 속담에 '새해 초하룻날 달력을 본다'(大年初一看曆書)는 말이 있다. 날짜가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멀리 보고 신속함과 조급함을 구분할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갖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구한의대 중어중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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