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년)

사랑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쓸쓸함에 대하여

빔 벤더스 감독의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년)

얼마 전 노래를 듣다가 참 오랜만에 듣는 곡이 나왔다.

대구 출신의 포크가수 김두수의 '대니 보이'였다. 수천 곡이 저장된 노래 중에 무작위로 듣는 메뉴에서 뜻하지 않게 걸린 노래였다. 기타 줄이 뜯기는 소리와 함께 흥얼거리듯이 힘겹게 내뱉는 남저음 목청.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밀려들어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대니 보이'는 길을 떠나 한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노래다. 길을 떠나 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일인지. 그래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인생 아닐까.

김두수의 '대니 보이'와 함께 오버랩되는 영화가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년)이다.

텍사스의 사막 한가운데 남자가 길을 가고 있다. 메마른 먼지만 생각 없는 바람에 풀썩이는 땅. 하늘에는 독수리가 날고, 남루한 옷에 물병 하나, 빨간 야구모자는 왜 이리 낯선지. 이 남자는 걷고 또 걷는다.

이 남자의 무심한 발걸음을 따라가던 카메라 너머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여음이 긴 기타음은 메마른 남자의 몸을 소리통으로 처연하게 울린다. 오래 깎지 않은 수염에 비쩍 마른 얼굴, 눈만 퀭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허름한 창고를 발견한 남자는 곧 쓰러진다. 이 사내는 도대체 왜 사막을 혼자 방황해야 할까.

'파리, 텍사스'는 빔 벤더스 감독의 1984년 작품으로 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베를린 천사의 시''멀고도 가까운' '구름 저편에'를 비롯해 '돈 컴 노킹'까지 빔 벤더스는 고향을 잃거나 가족을 상실한 채 떠도는 인생의 여정에 늘 포커스를 맞추었다. 푯대 없이 방황하며, 늘 영원히 노스탤지어를 꿈꾸는 것은 어떻게 보면 황량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남자의 이름은 트레비스(해리 딘 스탠튼). 기억상실과 실어증에 걸려 4년간 몽유병 환자처럼 떠돌아다녔다. 소지품에서 가족을 발견한 의사의 연락에 동생이 그를 찾아온다. 동생이 와도 그는 계속 침묵만 지킨다. 그리고 동생이 맡아 기르던 아들을 만난다. 차츰 의식을 찾은 그는 아내 제인(나스타샤 킨스키)을 찾는다.

아들에게 매달 이름 없이 돈이 송금돼 온다. 휴스턴에 있는 그 은행을 찾아가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에서 아내를 만난다. 너무도 그리워하던 아내지만, 그녀는 남편을 볼 수가 없다. 유리벽이 가로막힌 핍쇼(훔쳐보기 쇼) 업소. 손님으로 가장한 트래비스는 아내를 만난다. 제인은 이 남자의 사연을 들어준다.

"나에게는 젊은 아내가 있었어. 그러나 그녀는 나를 떠나려고만 했지. 사정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별수 없었어. 아내를 잡아 두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어. 발목에 방울도 달았지만 소용이 없었어."

유리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듣던 제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캄캄한 저 너머에 있는 남자. 그에게 다가간다. "오! 트래비스." 유리벽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닿을 수 없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 다시 맺어질 수 없는 슬픈 해우. 이때 흐르는 애수 어린 기타 선율은 관객에게 아리도록 저미는 그리움과 여운을 선사한다.

'파리, 텍사스'는 텍사스 주에 있는 파리라는 뜻이다. 황폐한 땅에서 달콤한 꿈을 그리는 것이다. 한 공간에 함께할 수 없는 부정교합의 이미지다. 마치 제인과 트래비스처럼 말이다.

라이 쿠더(1947년~ )라는 음악가가 없었으면 이 영화가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빔 벤더스의 말처럼 사운드트랙 또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트래비스가 사막을 걸을 때 흘러나오는 타이틀곡 '파리, 텍사스'는 둔중하며 무거운 기타음이 가슴 저미도록 쓸쓸함을 증폭시켜 주는 곡이다. '아이 노우 디즈 피플'(I know these people)은 핍쇼에서 제인에게 들려주던 회한 어린 트래비스의 독백을 그대로 음악과 함께 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어(I knew these people. It's two people. They love each other….' 오랫동안 가슴에 넣어 둔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들려주는 트래비스 역의 해리 딘 스탠튼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곡이다.

이외 '브라더'(Brothers), '낫싱 아웃 데어.(Nothing out there)를 비롯해 황혼에 젖은 어두운 도시를 떠날 때 사용된 '다크 워즈 더 나잇'(Dark was the night) 등 모두 주옥 같은 곡들이다.

'파리, 텍사스'는 많은 말들을 숨겨놓고, 곳곳에 말줄임표를 쓰고, 또 의도적으로 뒤틀기도 한다. 컷과 컷 속에 은유와 상징을 섞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라이 쿠더의 음악은 시에 곁들여진 커피와 같은 존재다. 긴 여행길에서 보내는 엽서와 비슷하다. 김두수의 '대니 보이'처럼 다시 들으면 좋을 가을 음악들이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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