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닥터 지바고

얼마 전 한 전문가가 30, 40대 영화팬들에게 물어봤다. 첫눈이 내리면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상당수가 '닥터 지바고'(1965년 작)를 꼽았다고 한다. 영화팬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은 명장면이 많기 때문이다.

영상미가 그만큼 돋보이는 영화도 없을 것이다. 긴 연기 내뿜으며 눈 쌓인 철길을 헤치고 달리는 기차, 눈 덮인 자작나무 숲, 요정이 사는 집처럼 꽁꽁 얼어버린 얼음궁전, 유리창에 낀 두꺼운 성에, 지바고(오마 샤리프 분)의 얼굴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눈을 감고도 훤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혁명과 전쟁의 와중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인간 군상과 남녀의 애절한 사랑, 낭만적인 듯하면서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눈 덮인 풍경은 왠지 모를 슬픔의 심연으로 빠지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읽는 것보다 영화에서 더 감명을 받은 유일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핀란드에서 촬영됐다. 마드리드 근교 고원 지대에 모스크바를 재현해 800m에 이르는 세트장을 만들었고, 눈 장면은 러시아와 자연환경이 비슷한 핀란드에서 찍었다고 한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오마 샤리프에게 "당신은 연기할 생각을 하지 마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촬영 중 회의를 느낀 오마 샤리프가 "이래도 되느냐"고 반문하자, 감독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사람들은 당신만을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오마 샤리프의 눈(目)동자 연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우수에 가득한 눈동자, 비밀경찰에 쫓기며 초조한 눈동자, 라라를 그리는 애잔한 눈동자,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은 연민의 눈동자…. 연기가 절제되면 그 잔상이 훨씬 오래 남는 것 같다.

눈(雪)은 적게 오면 낭만이지만 많이 오면 고통이다. 요즘 중부 지방에는 집 앞과 거리의 눈을 치우지 못해 온통 난리다. 눈과 함께 생활하는 에스키모들은 눈을 지칭하는 단어가 10개가 넘는다. 물기 많은(없는) 눈, 밀가루 같이 날리는 눈, 눈송이가 큰 눈, 무거운 눈, 비와 섞어 오는 눈 등이 있다고 한다. 이번 눈은 '귀찮은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이번 겨울 '라라의 테마'를 들으며 닥터 지바고를 다시 한 번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박병선 논설위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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