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새로운 한 해를 여행하면서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다. 단지 그의 객석이다"라고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씨가 생전에 말했다. 2009년을 덧없이 보내고 2010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떤 시간들을 의미 없이 보냈으며 앞으로 어떤 시간들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때론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반성과 회한으로, 때론 희망과 기대감으로 지켜지지 않을 막연한 약속들을 늘어놓아 나를 재무장하고 그래서 나를 안심시키게 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반복되는 무의미한 변명들을 화두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이번에는 기필코 달라지리라 수없이 되뇌며 내 인생의 보석들을 찾으리라 다짐 또 다짐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시간 속에 있지만 그것을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다. 속수무책으로 짝사랑할 뿐이다. 그래서 더 공허하다. 이것이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의 슬픔이다. 나의 남은 시간을 내가 다스릴 수는 없을까?

왜 우리는 이토록 행복하기 힘든 것인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 문명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를 '문명의 불만'으로 압축해 표현한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억압하는 것을 기초로 생성된 '문명'은 그 본질에 있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는 게 프로이트의 결론이다. 그렇다고 평생 세상에 불만을 갖고 투덜거리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불평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건 바로 분명 내 자신이 가지고 있을 어떤 부분을 미워하고 불평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면서 무심코 잊고 지나가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간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시간을 외부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독재자처럼 느끼며 시간의 박자가 우리 안에서 생겨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아직 내적인 시간의 근원을 잘 알지 못해 우리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리듬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루하루를 마치 기성복처럼 받아들인다. 충분히 맞춤복을 마련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시간과 관련된 수많은 놀라운 현상 중 특히 매력적인 것은 시간이 날아가고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시간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386세대이다. 나의 부모님이 내게 그랬었고 내가 내 아이에게 그렇게 요구하듯 기성세대는 먹고사는 것이 중요해서 무조건 달리기를 해왔다. 하지만 무조건 질주를 하다 보면 길을 잃게 된다. 이제는 나침반을 들고 지도를 보며 가야 할 때이다. 스펙은 차이에 불과하다. 그 차이에 따라서 기성세대들은 청년세대들을 차별한다. 차이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달라야 한다. 자신의 다름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은 바로 스스로를 열렬히 뜨겁게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살아 있음에 대한 행복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재미있는 행복을 선택하라!'

현대인들은 행복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명품 인생을 꿈꾸며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불행을 감수한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면 죄의식을 느끼고, 재미있으면 불안해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뭔지 불안하다. 휴일에 잠시 낮잠만 자고 일어나도 뭔가 찝찝하다. '이렇게 쉬어도 되는가?' 싶은 것이다. 21세기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근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다.

사는 것이 재미있으면, 일하는 것이 재미있으면, 그리고 배움에 매진하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으면 하지 말라고 해도 근면, 성실해진다. 순서를 바꾸라는 이야기다. 21세기에는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하다. 지금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2천500년 전 공자는 "즐기는 사람이 제일 낫다"(知之者 不如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했다. 지금 여러분의 시계가 한없이 느리다면 여러분은 아무것에도 뜨겁지 않다는 이야기다. 무언가가 소중해질 때 가만히 보라. 의미 없던 시간들이 어떻게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지. 그저 흘러가기만 하던 시간이 어떻게 고여 마음의 회오리를 일으키는지.

이제 한 해를 허무하게 보냈었고 새로운 한 해를 여행할 준비를 하며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한다. 그것은 지켜지지 않을 허망한 약속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재미있고 신명난 삶의 시간이 되도록 모색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감탄할 수 있는 행복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타인과 나누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을 신이 가로막은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다만 내 스스로 그 길을 가로막았을 뿐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입구의 커다란 시계 밑에는 의미심장한 글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시간은 사라지는 법.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라고.

최웅용 대구대 교수 산업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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