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와세다 유학시절 '女工'삶에 충격…사원복지 최우선 원칙으로

지난해 말 기자가 찾아간 일본 와세다대학. 호암은 꼭 스무살 되던 해인 1930년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호암은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지난해 말 기자가 찾아간 일본 와세다대학. 호암은 꼭 스무살 되던 해인 1930년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호암은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여공애사'(女工哀史)라는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내 공장 여공들의 참혹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공애사'를 똑똑히 기억하던 호암은 수천명의 젊은 여직원들이 근무했던 제일모직을 최고의 사원복지 모델로 만들었다. 기업인은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1960년대 제일모직 대구공장 기숙사. 꽃과 나무로 어우러인 이곳은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국내 최초·최고의 기숙사였다. 그래서 제일모직 사원들은 제일대학 학생들로 불리기도 했다. 호암은 공장 가동 초기부터 기숙사를 가동운영했다.
1960년대 제일모직 대구공장 기숙사. 꽃과 나무로 어우러인 이곳은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국내 최초·최고의 기숙사였다. 그래서 제일모직 사원들은 제일대학 학생들로 불리기도 했다. 호암은 공장 가동 초기부터 기숙사를 가동운영했다.
1961년 제일모직 대구공장 방적과 정방실을 둘러보는 호암(가운데).
1961년 제일모직 대구공장 방적과 정방실을 둘러보는 호암(가운데).

호암이 꼭 스무살 되던 해인 1930년 4월, 호암은 일본 사학의 명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

당시 호암은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중이던 일본 사회를 어깨너머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호암식 경영'의 큰 줄기 하나를 엮어냈다. 바로 자신의 회사에 몸담고 있는 '식구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호암은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여공애사'(女工哀史)라는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호소이 와키조(1897~1925)가 쓴 이 책은 1925년 출간됐는데 당시 일본내 공장 여공들의 참혹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전 3시 30분에 출근, 오후 6시까지 무려 14시간 30분이라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오후 6시, 일이 끝나고도 가로 90cm, 세로 180cm밖에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몸을 눕혀야 했다. 끼니를 비료용 생선으로 때우는 이들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가혹한 노동과 형편없는 식사, 잠자리, 그들 대다수가 폐병에 시달렸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여공애사를 쓴 작가도 14세 때부터 공장 직공으로 일했고 제대로 먹지 못해 책이 출간되던 1925년, 28세의 꽃다운 젊음을 마감해야 했다. 부잣집 아들로 엄청난 거금이 들어가는 일본 유학길에까지 오른 호암에게 '여공애사'는 충격이라는 단어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호암이 삼성의 창업지 대구에 세웠던 제일모직은 그래서 특별했다. '여공애사'를 똑똑히 기억하던 호암은 수천명의 젊은 여직원들이 근무했던 제일모직을 최고의 사원복지 모델로 만들었다. 기업인은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호암의 고집

호암은 1954년 대구 침산동에 제일모직을 세웠다. 1950년대 공장이라고 하면 생산시설 이 외의 다른 부대시설은 염두에 두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호암은 달랐다. 그는 공장을 지을 때마다 사원복지시설을 생각했다.

"공장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기숙사부터 먼저 짓고 정원까지 꾸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들 합니다. 기숙사에 스팀 난방시설을 한 것도 그렇고, 복도에 회나무를 깔고 목욕실에, 다리미실까지, 너무 많은 돈을 들인다고 합니다."(당시 제일모직 간부사원)

"나는 여직원들에게 단순히 직장만 제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들의 몸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오. 여직원들에게 먹고 잘 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숙사 생활을 통해 그들의 교양을 높이고 정서도 기르면서 이 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공장생활이라는 것이 매우 단조로운 일이다 보니 자칫하면 여직원들의 정서가 메마르고 정신건강도 좋지 않아져요. 그래서 기숙사 시설을 최신식으로 꾸미는 겁니다."(호암)

"기숙사면 됐지. 정원을 만들고 꽃을 심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사치고 낭비라고 합니다."(제일모직 간부사원)

"돈이 들긴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그게 다 사회에 대한 봉사가 되는 거요. 여직원의 능률이 오르면 그만큼 생산비가 싸질 것이고 제품의 생산원가도 낮아질 것이 아니겠소? 모직은 고가의 제품이요, 만드는 사람의 자질이 뛰어나고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우도 최고로 해주어야 하오."(호암)

◆'제일대학' 학생들

호암의 '고집'으로 탄생한 제일모직 기숙사. 이곳은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숙사였다. '진심·숙심·선심'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숙사 3개동 주변은 갖가지 꽃과 나무로 가득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가족들이 면회 오면 여직원들은 정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따로 있었고 전속 사진사도 있었다.

건물 안에는 미용실·세탁실·목욕실·다리미실·도서실 등이 갖춰졌다. 목욕탕은 24시간 내내 개방됐고 한꺼번에 200~300명이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였다.

방에는 보일러가 들어왔다. "이화여대 기숙사 다음으로 잘 돼 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래서 제일모직 기숙사는 '제일대학'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최고'라는 소문이 나면서 '제일대학'에는 손님들의 방문이 잇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7년 10월 말 국방부 장관, 미 극동군 사령관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장실을 보면 굳이 다른 곳을 볼 필요가 없다"며 깨끗하게 개조된 수세식 화장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수세식 화장실은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나 볼 수 있었다.

5·16이 터진 1961년 늦가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문했다. 검은 안경을 끼고 기숙사를 천천히 둘러보던 박 의장은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어"라고 흡족해했다.(1956년부터 1962년까지 기숙사 사무실에 근무한 권길희씨의 회고 중에서)

'최고의 공장'으로 알려지면서 제일모직 생산직 모집 공고가 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처녀가장들은 자신의 월급으로 동생 3명의 학비를 대고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할 수 있었고 좋은 신랑감을 만나 결혼을 했다.

◆기업은 사람

"내 일생을 통하여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1980년 7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호암은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 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인재양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표현한 것이다.

호암은 한번 쓴 사람은 믿었다. 대구에서 삼성을 처음 세웠을 때부터 그랬다.

호암이 삼성상회 창업 직후 대구에서 인수한 조선양조. 한국전쟁으로 사업의 기반을 잃어버렸던 호암은 대구의 간부들에게 맡기고 떠났던 조선양조로 인해 재기할 수 있었다. 조선양조 사장 김재소, 지배인 이창업, 공장장 김재명씨 등은 전쟁통에 재산을 거의 잃고 피란 온 호암에게 거금 3억원을 비축해 건넨 것이다. 호암은 이를 밑천으로 삼성물산을 재건했고 삼성그룹으로의 도약이 가능했다.

호암은 1957년 우리나라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사원공채를 했다. 이때 공채된 제1기생 27명 중 5명이 전문경영자로서 삼성그룹의 계열사 사장직에 올랐다.

호암은 "나는 기업생활 40여년을 통해서 '기업은 사람'이라는 경영이념을 실천해왔다"고 했다. 호암은 그룹 회장직에 올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참여해온 일화는 유명하다.

호암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채용 후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단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최대였던 삼성연수원을 만들기도 했다.

"기업이 귀한 사람을 맡아서 훌륭한 인재로 키워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게 만들지 못한다면 이 역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투자. 이를 통해 기업은 초일류기업 삼성을 만들어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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