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처뿐인 영광, 공익제보…(상)보호받지 못하는 공익제보

"긁어 부스럼 만들었나" 자책감도

정의와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혈세 낭비를 막았다는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공익 제보자, 내부 고발자의 삶은 헝클어졌다. 파렴치범으로 몰렸고, 조직에서 따돌림 당했다.

2004년 경북 영덕 사학재단, 2006년 밀라노 프로젝트, 2008년 대구 애활원 비리 수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대구·경북 공익제보자들의 삶 역시 피폐해졌다. 추적 결과 해고 이후 경제적 궁핍과 정신적 공황, 감당할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해고

2008년 애활원 비리가 터졌다. 이곳 원장은 공금횡령과 아동 성폭력 혐의로 고발됐다. 생활복지사와 직업훈련원의 생활교사 5명이 노조를 결성하면서 성폭력·비리 재단에 맞서 싸워 얻어낸 성과다. 그러나 시설 보호아동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노조원들은 결국 쫓겨났다. 재단이 직장 폐쇄 조치를 하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13년 간 몸담았던 곳을 떠나야 했던 당시 노조원 주진은(49)씨는 "순진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기독교 재단이라는 점과 직원들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대화가 통하리라 생각했다는 주씨는 "직원들이 원한 건 '원장, 물러나라'는 게 아니라 정상화였다"고 씁쓸해 했다.

해고당한 노조원들의 삶은 고단했다. 다른 곳에 재취업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어떤 일거리도 찾지 못한 채 17개월을 보냈던 주씨 역시 부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해야 했다.

김중년(55·영덕여고 행정실장)씨는 2004년 영덕여고 재단 비리를 세상에 알렸다 보복 조치로 해고를 경험했다. 한국투명성기구가 수여하는 투명사회상을 받기도 한 김씨지만 이후 2년 8개월 동안 지루한 법적 공방을 치러야했다. 김씨 덕분에 경상북도교육청은 사학 재단의 횡령 전반을 조사할 수 있었고 폐단을 줄일 수 있었으나 정작 김씨의 삶은 질곡의 연속이었다. 해고 이후 월 90만원의 사학연금으로 생계비에 소송 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다. 김씨는 "사학 재단의 비리는 증명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김씨에게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왜 긁어 부스럼 만들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느냐'는 주변의 비난이었다. 이후 해고 무효 소송에서 승리한 김씨는 2008년 7월부터 복직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후유증

1999년부터 2008년까지 1, 2단계 사업으로 나뉘어 국비와 시비 등 모두 8천600여억원이 투입된 밀라노 프로젝트의 집단적 횡령과 불법행위는 2006년에야 내막이 드러났다. 정부지원금 불법비자금 조성, 특별회비 수입 위조, 각종 행사에 관여한 공무원의 금품수수가 사실로 드러났고, 관련 전·현직 임직원들의 전원 유죄가 인정돼 정부보조금 8억여원에 대한 환수조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결정적 제보자인 박경욱(43·한국패션센터 노조위원장)씨의 삶은 나빠졌다.

15일 대구 북구 한국패션센터에서 만난 박씨의 눈초리에는 경계의 빛이 강했다. 인터뷰 이유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박씨는 "강한 대상과 싸웠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며 "계속 공격을 당하다보니 방어 차원에서 나 역시 날카로워진 것 같다"고 했다.

사건 이후 4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박씨에겐 공익 제보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실제 박씨는 2007년 12월 정신과 상담을 한달 간 받았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이 그를 피하면서 6개월 간 밥을 혼자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늘 사람들과 만나는 걸 즐겼던 이전의 삶과 판이했다.

이 때문에 집에서 폭식을 했다. 당시 70㎏이던 몸무게는 현재 100㎏. 마른 버짐(건선)이 몸 군데군데 나타나는 등 신체도 변했다. 피부과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면역장애가 나타난 것일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집착'이었다. 박씨는 "누군가가 나를 지속적으로 감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공익제보로 관계 당사자들의 유죄가 확정됐는데도 이렇게 힘듭니다. 만에 하나 무혐의로 풀려났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