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단군신화에서 태백산은 백두산을 일컫는다. 종교단체들은 분단 이후 천제(天祭)를 지낼 새로운 제단을 찾아 나섰고 그 결과 상징성과 접근성에서 우위를 보인 태백산이 백두산을 대신하게 되었다. 태백산이 민족의 성지로 주목 받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지명의 유사성만으로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을까. 아니다. 태백산은 삼한시대부터 줄곧 민족의 명산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친히 이곳에서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신라에서 태백을 5악(五岳) 중 북악으로 숭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왕조와 지방 방백들은 수 천 년 동안 이 전통을 지켜왔다. 백두산은 민족의 터전으로 상징성을 가졌지만 국경지대에 위치해 접근성이 떨어지고, 단군신화의 성지로 숭앙 받았지만 지리적 격리감이 너무 컸다. 그 틈새에서 적당한 접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태백산이었다. 민족의 터전으로서의 상징성과 국토의 중심으로서의 지리적 접근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민족의 영산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완만한 등산로 가족 등반지로 적합
태백산은 강원도 영월군,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의 경계에 있는 산. 함경도에서 뻗어온 태백산맥의 준령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두타산을 지나면서 높이 솟구쳐 산맥을 이루었다. 태백산맥의 준산(駿山)답게 주변에 함백산(1,573m), 장산(莊山'1,409m), 구운산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을 거느리고 있다. 예로부터 천년병화(千年兵火)가 들지 않는 길지로 알려졌고 백두대간의 정중앙에서 기운을 뻗치는 정맥의 거점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태백산은 덩치에 비해 코스가 가파르지 않고 위험한 구간도 없어 가족단위로 오르기에 적합하다. 산행은 유일사-장군봉-주목군락지-천제단-망경사-문수봉-당골 코스가 대중적인 코스. 총 산행시간은 5시간 안팎이다.
태백산은 5대 단풍산에 들 정도로 활엽수림이 울창하다. 봄철이면 장군봉~부쇠봉 능선에 펼쳐진 철쭉군락은 천상화원을 연출한다. 그러나 산꾼들은 태백산 하면 너나없이 겨울산행을 떠올린다. 풍부한 적설량과 환상적인 상고대, 주목 설화까지 눈 산행의 덕목들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 벽두 눈 소식과 한파 소식에 전국이 요란할 때 취재팀은 태백으로 향했다. 유일사 매표소는 전국에서 설경을 즐기기 위해 몰려든 등산객들로 북적였다. 유일사 초입에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낙엽송들이 일행을 반긴다. 곁가지 하나 없이 거침없이 수직으로 뻗어나간 그 기상에 마음까지 후련해진다.
◇혹한에도 얼지않는 '용정' 최고의 물맛
등산로는 비교적 완만하다. 순백의 설산 풍경을 만끽하며 스틱을 내딛는다. 눈 덮인 계곡엔 등산객들의 수다와 아이젠 소리가 적막을 깬다. 북쪽으로 눈에 덮인 함백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만항재 능선을 따라 원색의 등산복 물결이 색실처럼 펼쳐졌다.
산행시간 두 시간 만에 일행은 드디어 장군봉에 올랐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설산의 파노라마가 시선을 간지른다. 산에도 원근(遠近)이 있다. 주목의 상고대가 미시적(微視的) 즐거움이라면 사방 설산의 스카이라인은 거시적(巨視的) 즐거움이다. 장군봉에서 10여분 쯤 오르면 천제단에 이른다. 둘레 27m, 높이 3m. 자연석으로 쌓은 66㎡(20평)가량의 원형 제단이다. 매년 개천절엔 이곳에서 제천의식이 열린다.
망경사(望鏡寺)는 천제단 바로 아래쪽에 있다. 눈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눈 속에서 비각하나가 고즈넉이 서있다. 단종비각이다. 영월로 유배 와서 비극적 생을 마감한 단종을 기리기 위해 건립 되었다. 산꾼들은 정상의 칼바람을 피해 모두 이 절에 내려와 점심을 먹는다. 탁 트인 전망과 따뜻한 볕, 그리고 간이매점까지, 망경사는 태백산의 천상의 테라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바로 밑에선 송아지만한 멧돼지 한 마리가 등산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쓰레기를 뒤지고 있다. 한 50m 쯤 될까. 돼지는 이 선을 넘지 않고 사찰측도 산짐승의 소행(?)에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망경대의 명물 중의 하나는 절 입구의 용정(龍井). 태백산의 혹한 속에서도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전국의 100대 명수 중 최고의 물맛을 자랑하고 있다. 표주박을 기울여 약수를 한모금 들이켠다. 냉기가 식도를 타고 짜르르 흘러내린다. 투명한 약수에 건너편 문수봉이 투영된다. 문수봉은 신라시대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이 이곳에서 수련을 했다고 해서 '원술봉'으로 불리기도 했다.
◇4천여그루 주목 군락…1천년 노목도
장군봉~문수봉 구간은 주목 군락지로 유명하다. 태백시 자료에 따르면 이 산에 모두 4천여그루의 주목이 있다고 한다. 짧게는 수령 30, 40년생부터 길게는 1,000년 노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천년이면 이미 왕조 서 너 개쯤은 지나온 시점이다. 그렇다면 저 노거수는 오래전 고려 왕건의 건국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다음 천년 후 우리는 저 나무에게 어떤 역사를 펼쳐 보일까.
취재진은 다시 문수봉으로 향한다. 중간에 경유하는 부쇠봉(1,546m)은 소백산맥의 시초가 되는 곳이다. 남서쪽으로 구운산(九雲山'1,346m)에 길을 내주고 직진하면 문수봉에 이른다. 문수봉은 온통 너덜지대다. 수만 개의 바위들이 골을 따라 암류(巖流)를 이루었다. 정상에는 천연석으로 쌓은 돌탑이 우뚝 서있다. 장군봉에 비해 인파는 훨씬 줄었지만 알고 보면 이곳도 '태백 8승'에 적을 올린 명소다.
이제 취재팀은 하산 길로 접어든다.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겨울 산 속에서 청량한 화음을 낸다. 하산 길에 다리가 아파 오면 '반재'가 가까워 온다는 신호다. 반재는 당골과 천제단 반쯤에 있다고 해서 반재다. 호환(虎患)을 당한 화전민들의 무덤이라는 호식총(虎食塚)을 돌아서면 환상적인 낙엽송 군락이 나타난다. 공중으로 뻗은 나무들의 위세에 햇빛이 가릴 정도다. 바닥엔 낙엽송 잎들이 융단을 이루었다. 눈 반(半), 낙엽 반 융단 길을 걷다보면 당골광장이 나타난다. 터의 기운이 세기로 유명한 당골은 이름처럼 한때 무속인들의 천국이었다. 새마을운동 당시 상당수가 철거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그 자리에 단군성전이 넓게 터를 잡고 있다.
단군성전의 추녀 끝으로 눈 속에 잠긴 정상이 오버랩 된다. 태백산은 오대산-설악산-함경도를 거쳐 백두산까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 비록 진부령에서 대간길이 끊어졌지만 언젠가 다시 산길을 이어 백두산에서 천제를 지낼 날을 기대해 본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李대통령, 남아공 대통령·호주 총리와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