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살짝 미쳐가고 있습니다'

가난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박정희)이 지은 노래 가사에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란 구절을 넣어야 했을 만큼 고달프고 못사는 게 한(恨)이 됐던 그 시절엔 그래도 지금보단 속은 편했고 나름 행복했습니다. 뒤틀리고 흉포한 성정(性情)도 없었습니다. 죽이고 빼앗고, 속이고 싸우는 짓을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떵떵대며 잘산다는 요즘 세상은 어쩌다 이토록 험한 꼴로 굴러가는 것입니까. 왜들 너도 나도 더 좋은 휴대폰, 더 큰 차, 더 넓은 아파트, 더 높은 권력과 명성을 좇으며 '더, 더, 더'란 말만 외쳐댈까요. 밥이 되고 싶다며 빈 육신, 빈 마음으로 떠난 추기경이 100명이 더 나온다 해도, 산속 움막에서 다 비우고 살다간 무소유의 스님이 1천 명이 더 나와도 한순간 숙연해할 뿐, 금세 세속의 욕망 속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가벼운 세상이 돼 갑니다.

양심과 도덕의 마지막 보루인 교육계마저 수업 예산으로 호화로운 교장실을 짓고, 불법 찬조금을 8억 원씩이나 거두고, 상(賞) 준 대가로 뇌물을 받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조합장 선거를 미끼로 한 마을 수백 명이 금품을 받아 챙깁니다. 전직 국무총리는 골프채 뇌물 의혹으로 수사 대상에 오르내립니다. 사지가 멀쩡한 게으름뱅이는 짐승 같은 욕망으로 죄 없는 어린 소녀를 서슴없이 죽입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공기업 지도자는 부하들의 부패를 알고도 쉬쉬 덮어주며 엉터리 감사로 눈을 감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법부는 일부 들쭉날쭉 중구난방의 판결들을 쏟아내 백성들이 콧방귀를 뀝니다. 16.8% 국민만이 법원을 신뢰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콧방귀'란 비속어를 쓰는 이유입니다. 가족들과 강변에 김밥 싸서 놀다 오는 게 여름휴가의 전부였다던 어느 가난한 부장판사의 일화도 가난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그때 판사들의 판결은 서슬 퍼런 천명(天命)처럼 알고 받들어졌습니다.

국회의원은 또 어떻습니까. 절 주지와 압력 시비나 하며 밤낮없이 싸우니 80.4%의 국민이 '국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믿을 수 없는 집단에 나라와 내 삶의 미래를 맡기고 산다는 얘깁니다. 미친 짓입니다. 가난했을 때의 우리는 이렇게까지는 병들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나라, 이런 세상이 됐을까요. 4대강, 세종시 다 중요합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 일을 벌여야 살아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너나없이 욕심부터 버리는 정신을 되찾아야 온전히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타(利他) 정신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까지는 못 미쳐도 좋습니다. 나라의 아래위가 탐욕의 덫에서 못 헤어나면 아무리 사형수 감옥을 튼튼히 만들고 대통령이 개혁의 앞줄에 나서 외쳐 봤자 담배 씨만큼도 좋은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욕심으로 병든 정신은 그대로 두고 4대강, 원전, 수출 앞세워 용케 부자가 돼도 불행한 나라, 마음이 초라한 국민이 될 뿐입니다. 장롱 속에 천금을 쌓아두고 집 앞 골목길에서 못 가진 자에게 살인을 당하는 세상이라면 이미 미쳐가는 세상입니다. 열 번 찍을 능력밖에 없는데도 남의 산의 아홉 그루 나무까지 이 나무 저 나무 다 찍어대다 한 나무도 못 자르는 끝 모르는 탐욕. 그게 오늘 우리들 일부의 자화상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욕심을 줄이거나 지금 가진 것을 더 늘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살게 되고부터 우리는 가진 것을 더 늘리는 쪽으로만 살아갑니다. 무리하게 늘리려 탐하다 하이힐에 얻어맞고 감옥 가는 걸 보면서도 죽어라고 늘리기만 합니다. 가난했던 시절엔 욕심을 줄임으로써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보다 소득이 200배로 불어났다는 지금 우리는 200배 더 행복해졌을까요? 아니라면 가진 것이 없어서 저절로 무소유가 됐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욕망을 줄여 행복해지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들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는 이기(利己)와 욕망의 늪에 빠진 채 어떻게 보면 여기저기서 '살짝 미쳐가고' 있습니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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