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7일 오후.
육군본부는 한강 이남 시흥의 육군보병학교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제7사단장 유재흥(劉載興) 장군은 미아리 전선까지 밀려난 혼성부대를 편성,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북한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는 아군의 방어선을 뚫고 거침없이 남진을 거듭해 불과 사흘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함락했고 적도(赤都)로 변한 서울은 붉은 물결이 넘쳐난다. 그 여세를 몰아 수원과 평택을 거쳐 대전을 점령한 적은 마침내 호남지역과 남해안 내륙까지 깊숙이 휩쓸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부선을 타고 낙동강까지 진출한다.
전면 남침을 전개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대구와 부산을 침공하기 위한 이른바 8월 공세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적화통일된 부산에서 8·15 광복 5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것이 김일성의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다.
북한 공산군은 제2집단군(군단) 사령부 휘하 제1·5·8·12·13·15사단 등 6개 사단을 김천 북방에서 동해안의 영덕으로 전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대구·영천·포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또 제1집단군(군단) 휘하 제3·4·6·9·10, 5개 사단은 105탱크사단(서울 점령 후 사단 승격)과 함께 김천에서 경남 진주선(晉州線)에 전개, 밀양과 부산을 점령하면서 대구의 배후를 찌른다는 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부산 침공작전의 우선권은 제1집단군에 주어졌다. 서울을 함락한 막강 3·4·6돌격사단과 105탱크사단이 휘하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제4사단과 함께 대전을 치고 김천·왜관을 거쳐 남진해온 제3사단은 남침 작전의 신호탄을 발사한 이학구가 참모장으로 있는 제13사단과 낙동강변 다부동에서 합류하게 돼 있었다. 3사단과 13사단은 다부동에서 대구를 해방하고 내쳐 부산으로 돌진할 계획이었다.
이 무렵 공산군 제13사단은 상주 낙동리에서 낙동강을 도하한 뒤 대구로 진공하기 위한 주공격로 개척에 나서고 있었다. 대구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왜관 동쪽 팔공산과 가산산성으로 향하는 다부동 국도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대전을 점령하고 남진 중인 제4사단은 김천에서 독자적으로 전북 진안·장수를 치고 합천과 고령을 공략한 뒤 도하작전으로 낙동강 동편의 창녕·영산을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 후속 부대로는 제2·9·10보병사단이 경북 성주~고령~경남 의령으로 공격 대형을 이루어 합천과 거창 등 낙동강 우안(右岸)에 병력과 장비를 집결시킨 뒤 선봉인 제4돌격사단의 배후에서 총공격에 나선다는 것이다.
한편 적 8사단은 경북 북부의 거점인 안동을 점령한 뒤 의성·영천으로 쳐내려와 대구의 배후를 노렸고 동해안에서 남진한 5사단은 영덕을 침공한 데 이어 동해안을 타고 포항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개전 이래 지칠 줄 모르고 속전속결로 남진을 감행해온 공산군은 바야흐로 서울, 경기, 충청, 전남·북, 강원도, 경남·북을 거의 석권하고 대구, 부산과 제주도만 남겨 둔 채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회전(大會戰)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2개월 간에 걸친 혈전의 서곡이 울리고 있었다.
낙동강 교두보는 피아 간에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線)이었다. 아군의 입장에서는 미 지상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병력과 장비가 부산항과 포항(영일만)을 통해 속속 도착하고 있어 증원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될 때까지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낙동강 교두보에서 적의 주력을 완전히 묶어 놔야 대구와 부산을 사수하고 이미 준비 단계에 들어간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전쟁 초기 수원으로 날아와 한강 저지선을 시찰한 후 이 같은 양면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두 개의 큰 작전을 동시에 전개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맥아더는 이 모험에 과감히 뛰어들었던 것이다. 후일 미 해병대가 편찬한 '한국전쟁 참전기'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서 100%의 승리를 약속하는 작전은 없다. 어떤 작전도 도박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 그런 점에서 도박에 강한 지휘관과 약한 지휘관이 있다. 맥아더 원수는 도박에 강했다. 그래서 그는 이 대담한 도박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적은 이미 병력과 장비가 한계에 도달했다. 불과 한 달 만에 천리길을 쳐내려오다 보니 보급선이 길어졌고 실탄마저 제 때에 공급되지 않았다. 시간은 분명 아군 편이었다. 아군은 무한한 물량 작전으로 상승 일로에 있었다. 적에게 오직 하나 남은 승산은 유엔군이 투입되기 전에 낙동강 교두보를 돌파, 부산까지 점령하는 길 뿐이다. 그래서 적은 이 도박에 모든 것을 걸었다.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7월 15일 전선사령부가 있는 수안보까지 내려와 "진격 속도가 느리다"며 "8·15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는 부산을 해방해야 한다. 즉시 낙동강을 도하해서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라"고 김책 전선 사령관을 독전했다. 이 때문에 적의 모든 전투부대는 재정비의 겨를도 없이 남북 1천300리에 걸친 낙동강 교두보로 집결하게 된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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