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제목

글을 쓸 때 고심하는 것 중 하나는 제목이다.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제목은 그 제목만으로도 글을 거의 다 쓴 것이나 다름없다. 마음 저 밑바닥에 쓰고 싶은 게 이미 있었고 제목이 참지 못하여 따라온 것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찾아드는 제목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글 제목 중에 '그냥'이 있다. 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닌 것이 어느 날 내게 다가와 글 한 편을 안겨주었다. 이 자그마한 부사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모두 들어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드는 글 제목을 발견하는 일은 귀하다. 내용에 비하여 거창한 제목, 내용과 어긋나는 제목, 인위적인 제목이 더욱 흔하다.

일전에 한 사진전을 관람하였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기에 궁금하여 가본 것이다. 첫 사진부터 끝까지 나의 마음은 내내 일렁거렸다. 간혹 사진전을 가보지만 자연이든 인물이든 기술적으로 변화를 주었든 아니든 기록 그 이상의 것이 아닌 사진에 식상해있던 참이라 더욱 그랬다. 그날의 사진에는 보도성을 뛰어넘는 예술성이 가득하였다. 구성미와 색감에 매료되었다. 무엇보다 피사체의 영혼을 탐색하는 작가의 태도가 작품마다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나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대면하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더욱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대개의 작품 제목이 '장소와 연도'였다는 점이다. '인도 카사미르 달-레이크, 1996년', '아프카니스탄 바미얀, 1992년', 이런 식이었다. 그 제목들을 보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 즉 모든 장면에 이보다 더 정확한 제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삶을 살아내는 시간과 장소,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제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진 예술의 특성상 이런 제목이 새삼스럽지 않지만 좋은 글 제목을 찾느라 노곤한 나의 마음은 더 없이 자유로워졌다. 작가의 의도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사진 안 인물의 심정을 헤아려보기도 하였다. 포커스를 받지 못하는 구석 자리에 마음이 가 닿기도 했다. '그 날 저 사람의 눈빛이 저러했구나. 그 날 저 할아버지는 저런 일을 하고 있었구나. 바람이 세찼구나. 건물이 무너졌구나. 전쟁터에서도 아이들은 뛰놀았구나. 개는 잠들었구나….' 이런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사진 속의 삶이 하나씩 하나씩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삶에 다른 제목은 필요없을지 모른다. 오직 시간과 장소면 충분하다. 오늘 나의 삶의 제목은 '2010년 5월 4일, 대구'일 것이다.

추선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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