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雲門에서 華岳까지](38)유천지맥 동부

500살 넘은 하평리 은행나무 지금도 성장…허리춤 계속 굵어져

당목에서 바라본 사고개마을. 정면으로 제일 높이 보이는 게 종지봉이고 그 서편 잘록이가 큰고개이며 더 서편에는 함박등이 있다
당목에서 바라본 사고개마을. 정면으로 제일 높이 보이는 게 종지봉이고 그 서편 잘록이가 큰고개이며 더 서편에는 함박등이 있다

유천지맥서 큰 지릉들이 발달하는 것은 그 동부 매전면 쪽이다. '효양산'으로 향하는 '효양산능선' '비룡산'으로 가는 '비룡산능선', 용당산을 맺는 '용당산능선', 지전리(紙田里) 지소(紙所)마을서 끝나는 '지소능선' 등이 대표적이다. 효양산능선-비룡산능선 사이엔 '비룡골'(중산골), 비룡산능선-용당산능선 사이엔 '대곡지'(골), 용당산능선-지소능선 사이엔 '용당골', 지소능선-본맥 사이엔 '송원리 계곡'이 형성돼 있다.

효양산능선은 유천지맥 첫 봉우리라 했던 '장돌봉'에서 분기한다. 그리곤 온막리 자미산(250m)까지 7.5㎞를 이어가며 서편 용산리 공간과 북편 및 동편의 덕산리-관하리(원정자마을)-하평리(박실·월촌마을)-동산리(새터·구동창마을)-북지리-호화리(호방마을) 공간을 가른다. 7개 마을이 저 자락에 깃든 것이다.

이 흐름에서 장돌봉 다음으로 주목할 지형은 거기서 곧바로 내려서는 480m재다. 남쪽 용산리 중산(中山)마을과 북편 덕산리 '춘바골'을 이어온 오래된 관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마을 사이의 옛길 노선은 이제 달라졌다. 남쪽 '안중산' 마을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길이 효양산능선 위로 끌어올려진 후 '바깥중산' 마을에 바로 닿도록 옮겨진 것이다.

480m재에서 다시 솟는 518m봉은, 그렇게 난 새 도로를 따라 걸을 경우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지형이다. 새 도로가 이 봉우리를 아예 비켜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라보면 그 윗부분이 상당히 펀펀해 작은 봉우리가 아님이 드러나고, 거기서 북으로 의미 있는 3차 지릉이 갈라져 나가기도 한다. 끝에 관하리 '원정자(院亭子)마을'이 자리한 지릉이 그것이다.

원정자마을은 한때 주변 6개(현재 기준) 행정 리(里)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그 마을들을 외종도면(1720년) 혹은 동상면(1896년)으로 묶다가 1906년 '종도면'(終道面)으로 개칭할 때 면소재지가 됐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을엔 시장이 서고 파출소도 개설됐다고 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원정자마을은 저 3차 지릉에 의해 남쪽 '박곡'과 구분된다. 518m봉~510m봉~528m봉~535m봉으로 이어지는 효양산능선 낮은 구간 전부를 뒷능선으로 삼는 매우 넓고 깊은 골이 박곡이다. 입구에 하평리 '박실'마을이 자리 잡았고 골 안은 감밭 천지다.

박실 남쪽은 하평리 월촌마을 공간이다. 효양산능선이 다시 586m봉으로 상승한 뒤 632m봉-625m봉으로 치솟는 구간이다. 하지만 쌍봉 같은 이 능선 최고의 저 봉우리들에는 이름이 없었다. 간혹 '솔왕산' '바라봉' 등의 명칭이 들리기도 하나 그건 더 아래 낮은 부분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라 했다. 측량 삼각점을 둘 만큼 조망 좋은 지점들이 저런 이름을 얻었다는 얘기였다.

월촌마을서 그보다 주목할 건 625m봉 지릉 끝 마을 등허리에 뿌리내린 '하평리 은행나무'일 듯싶다. 500살 넘은 거대 노목인데도 시든 가지 없이 창창하며, 아직도 성장을 계속해 허리춤이 갈수록 굵어지고 열매 또한 점점 더 많이 달린다고 했다. 이웃해 사는 어르신(86)은, 30㎝가량 되는 석순(石筍) 같은 목순(木筍)이 가지들 아래로 축 늘어져 자라는 것 또한 특이하다고 했다.

효양산능선은 625m봉을 지난 뒤 489m재로 급락하며, 이어 555m봉으로 오르고 562m봉으로 높아졌다가 495m재로 다시 가라앉는다. 555m봉~562m봉 사이 200여m 짧은 구간의 동편 '안골'에는 '새터'(동산리) 마을, 495m재 동편 '찬샘골' 에는 '구동창' 마을(동산리)이 자리 잡았다. 489m재는 서편 중산이골 '도선사' 쪽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495m재는 동편 구동창마을과 서편 '바깥중산' 마을을 잇는 오래된 길목이라 했다. 두 재 모두에서 양쪽으로 이어지는 길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했다.

495m재를 뜀틀삼아 마지막 도약하는 산덩이는 매전면 소재지 마을(동산리) 서편 봉우리다. 암괴들로 특출하게 치장하고 가파르게 솟아 동편의 토함산(통암산) 암봉과 호응하듯 일대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저 산덩이를 국가기본도는 '호랑산'이라 표기한 반면, 일대서는 대개 '효양산'이라 불렀다. 월촌서도 그러고 구동창서도 그랬다. 북지리·용산리도 다르지 않았다.

효양산능선은 효양산(580m)을 지난 뒤엔 폭락해 위세를 상실한다. 그런 모습으로 용산리 마을 안을 거쳐 둥그스름한 마지막 능선을 형성하면서 동창천 가로 내려앉는다. 앞서 본 '자미산'이 마지막 봉우리고, 그 남쪽 자락에 호화리 '호방' 마을이 자리했다.

이 효양산능선에 맞장구치면서 일대 지형을 결정하는 능선은 시루봉서 남동으로 내려서는 용당산능선이다. 출발점(679m)서 단번에 230m가량 급락해 445m재로 떨어졌다가 596m봉(용당산)으로 오른 후 2.5㎞에 걸쳐 서서히 하강해 동창천에 이른다. 그 끝 지점 온막리서 출발해 오르는 등산로가 발달해 있다.

효양산능선-용당산능선이 형성하는 큰 계곡은 매전면 용산리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골은 상부에서 복판으로 튀어나오는 '비룡산능선'에 의해 다시 둘로 갈린다. 유천지맥의 625m봉서 본맥과 예각을 이루며 북으로 출발하는 능선이 그것이다. 이 능선은 곧 580m재로 떨어졌다가 100여m 솟아 비룡산(684m)에 닿는다. 이후 680m봉을 지난 뒤 또 590m재로 숙였다가 마지막 624m봉-636m봉으로 솟는다. 전망이 별로 없는 이 정점 부분을 지난 뒤엔 점차 낮아지며, 그 끝 지점인 '불령사'(佛靈寺) 서편에 산줄기 등산로 들머리가 있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저렇게 해서 형성된 계곡은 하류로부터 거스르며 살피는 게 일목요연하다. 그 아래 용산리의 '사갈' 본마을 끝 지점서 북쪽을 향해 계곡을 오르기 시작할 때 왼편에 솟은 건 용당산이며 오른편 건 효양산이다. 그 즈음 왼편으로 나타나는 큰 시멘트다리를 그냥 지나쳐 직진하면 비룡골이고 얼마 후엔 불령사다. "비룡골 호랑산 기암절벽 아래에 서기 645년 원효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 한다. 절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탑은 '전국 유일하게 문양이 새겨진 흙벽돌(전)로 쌓은 전탑(塼塔)'이라 했다.

불령사 상류에 펼쳐지는 골은 '중산이골'이며, 거기에선 해발 380여m 높이의 '바깥중산'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 거의 비워지다시피 했었지만 근래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총 14호 규모로 되살아났다는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은 '도선사'(道瑄寺) 지점서 끝난다. 그 위에도 옛날 10여 가구 되는 '안중산'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골프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골프장은 비룡산 지릉들을 갉아내 터를 더 넓힌 모양새다.

저렇게 불령사를 거쳐 오르는 대신 아까 지나친 시멘트다리를 건너 좌회전해 들어서면 비룡산능선에 의해 둘로 나뉜 계곡 중 아랫부분인 '대곡지' 골짜기다. 그 속으로 이어가는 경운기길은 얼마 후 지류인 '소곡지' 골짜기로 들어섰다가 끝내 용당산능선 몸체 위의 445m재에 올라선다.

기러기 모양 등등의 솟대들로 예쁘게 치장된 445m재는 큰 당나무가 있어 예부터 '당목'이라 불려왔다고 했다. 거기서 좌회전해 능선을 오르면 20분 이내에 용당산 정상에 닿고, 우회전하면 시루봉으로 오른다. 반면 재를 넘어 직진하면 곧바로 용당골로 들어서면서 해발 440여m의 사고개마을에 닿는다. 당목이 용당골 및 '사고개마을'(용산리) 관문인 것이다.

사고개마을은 용당산-시루봉-종지봉-함박등-족두리산에 의해 둘러싸인 용당골 최상부다. 전기는 '큰고개'를 통해 청도읍에서 끌어오고 전화는 당목을 통해 매전면서 이어왔으나 자동차가 온전히 다닐 도로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고립산촌이다. 한때 10가구 넘는 마을이었으나 옛집은 비고 지금은 달랑 2가구다.

하지만 옛날 도보시대에 사고개마을은 행인이 끊이지 않던 교통요충지였다고 했다. 매전면의 예전리·용산리·온막리 일대 사람들이 청도읍으로 넘어 다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옛날엔 산지 특유의 누에치기를 통해 살림도 괜찮게 이뤘다고 했다. 깊은 산촌들이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았던 예는 중산마을이나 학일산 밑 안버구 마을 등에서도 공통되게 살펴지는 일이다.

마을 이름은 1918년 첫 지형도에서부터 '沙峴洞'(사현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마을 출신 한 어르신(대구)은 골이 네 개라고 해서 '사곡'(四谷)이라 했던 게 어원일 것이라고 관측했다. 사고개마을 및 용당골의 남쪽 담장 격 산줄기는 족두리산서 내려서는 지소(紙所)능선이다. 그 너머엔 송원리가 자리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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