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배추

벼 대신 심은 배추 대풍, 상인들도 외면…아! 울고 싶어라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패션 아울렛 올브랜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사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유호중(대구 남구 대명5동)

다음 주 글감은 '할머니'입니다

♥ 어머니가 남겨 주신 선물

우리 어머니는 시골에서 한평생 농사를 지으셨다. 우리 삼형제를 키우느라 평생을 밭에서 흙과 함께 살아오신 거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몸이 안좋으셨다. 큰 병원에 가보니 심장에 문제가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했다.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자식들은 그만 쉬라고 권했지만 어머니는 '집을 오랫동안 비울 텐데 정리를 해둬야 한다'며 더 열심히 일하셨다. 깨도 털고 마늘도 뽑고….

마침 가을걷이 시기라 안 그래도 바쁜데 어머니는 더욱 부지런히 손을 놀리셨다. 그것이 화근이었을까. 갑자기 쓰러지셨고, 그길로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자식들은 그렇게 황망하게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슬픔이 채 가시기 전, 우리는 어머니의 가을 갈무리를 마무리해야 했다. 밭에 가보니 배추며 무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주인의 운명을 모른 채 말이다. 우리는 눈물로 그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인 셈이다. 우리는 그 김치를 겨울 내내 먹으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주기 위해 배추를 길렀던 어머니를. 요즘도 배추를 보면 한 번씩 울컥할 때가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짓던 그 가을이 다시 돌아왔다.

최정숙(대구 수성구 범물동)

♥ 쌓아둔 배추 볼 때마다 울화통

요즘 배추 한 단 가격이 1만5천원으로 사상 최대 가격이 경신되었다고 매스컴에서 야단들이다. 우스갯말로 금치라고 표현되고 있으니 우리 서민들의 주부식인 배추김치를 먹는 것이 가계에 무척 부담이 간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내가 자란 시골은 농지의 절반 이상이 계단식 논에 천수답이었다. 그저 비가 와야만 모심기를 할 수 있는 논들이었다. 지금은 경지정리와 저수지 확장으로 수리안전답이 되어서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살기 좋은 고향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6, 7월에 비가 오지 않으면 모심기를 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쨍쨍 내리쬐는 햇살에 하늘을 원망하며 농부들의 애간장이 타곤 했다.

논바닥에 흙먼지를 날리다가 곧 가을이 올 즈음 모심기를 포기한 논에 대체작물로 김장배추 씨앗을 논 두 마지기 땅에 파종했다. 그해에는 가을철의 적당한 기후 조건으로 배추 농사가 대풍이었다. 온 들녘이 배추밭으로 보일 정도로 잘 되었다.

하지만 좋은 작황을 두고서도 농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겨울이 오기 전에 배추를 수확하고 마늘 씨앗을 파종해야 하는데 배추 상인이 오지 않으니 그 많은 배추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마구잡이로 뽑아서 논길에 무더기 지워 두었는데 잘 썩지도 않고 볼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곤 했다. 그 후로 우리 집에서는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만 배추 농사를 했다. 요즘같이 배추가 귀하고 비싸다고 하니 문득 지난 일이 생각난다.

이정란(대구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 "다녀가렴" 아버지 기별 기다려져

어느 때고 추석 명절이 시작되면 조용하던 시골 마을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손녀의 부산한 발걸음에 흡사 오일장을 맞이한 듯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집에 도착하니 사랑방 문을 부서져라 '와장창' 연 어머니가 "그래, 인자 오나?"하고 밖을 내다 보신다. 마음 같아선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지르고 싶으시겠지만 몇 해 전 부뚜막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친 이후론 문지방을 경계로 화들짝 반기신다. 이윽고 방에 들어 차례대로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그래 이번에는 몇 밤 자고 가노?"하고 미구에 닥쳐올 이별을 일찌감치 준비하신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벌써 가나?"하는 어머니의 눈물 섞인 말에 돌아보는 문지방 아래 짐이 바리바리 싸여져 있다. 살피듬이 두툼해 보이는 천둥호박 두어 개를 비롯하여 고춧가루, 참기름과 더불어 미처 못다 먹은 부침개랑 갓 담은 배추김치가 비닐봉지와 밀폐용기에 차례차례 담겨 올망졸망 자리하고 있다. "뭐가 이리 많아요!"하는 투정 반 어리광 반에 "에고, 야~ 야! 이까짓 게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된다고!"하시며 오히려 미안해 하신다.

거지반 차에다 짐을 옮길 즈음 아버지가 "일간 기별하면 올 수 있겠니?"하시기에 "예, 올 수는 있지만 왜요?"하고 방정맞게 토를 달자 "달장간 고구마를 캘 것인데"하고 말끝을 흐리신다.

'고구마?' 요즈음 고구마가 한 상자에 얼마? 줄잡아 만원, 그럼 내가 대구에서 시골까지 왕복 교통비는? 통행료를 포함해 대충 5만~6만원, 못된 아들은 아버지의 땀과 자식에 대한 정을 그저 단순한 숫자로만 셈하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버지로부터 빨리 기별이 오길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잖아 일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가 금추라 말하듯 다락같이 금이 오른 배추 때문이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당시 오밤중에 소피가 마려워 화장실을 가는 길에 채전 가득히 배추가 심겨져 있음을 보았다. 아직은 열쭝이처럼 어리지만 너울너울 펼쳐진 연두색 여린 배춧잎이 달빛 아래 싱그럽기 짝이 없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으로 풍요로운 농촌 풍경이란 생각에 부모님이 더없는 부자란 생각이 꼬리를 문다.

꼭 그 배추가 있어서만은 아니다. 어느 날인가 형님이 "이제 힘든 농사일은 그만 접으시고 대구로 오시죠!"하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나는 시골이 좋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으면 부자고 대구를 가면 가난해지는데 왜 가!"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런 연유로 본다면 배추를 떠나 곧장 아흔을 바라보시는 부모님은 옛날에도 지금도 여전히 부자시다. 아니 따지고 보면 마음이 풍요로운 시골 전체가 부자다. 흔히들 만원 지폐를 '배추이파리'에 비유하여 보물처럼 여겨 눈에다 불을 켠다. 그런데 지금 시골에선 내남없이 그 귀하다는 배추를 땅에다 지척으로 널어두고 있으니 말이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 "김치 담그지마" 큰소리 후회막급

해마다 어머님께서는 김장을 해 가장 맛있는 부분만 통에 담아 챙겨놓고 가져가라고 하셨다. 자식을 위하시는 마음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자식에 대한 기대 또한 너무나 커서 당신이 하신 만큼 따라가 주지 못하시니 항상 불만이셨다. 어머님은 온몸으로 차곡차곡 공덕을 쌓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격이 강하셔서 차곡차곡 쌓은 공덕을 말 한마디로 한 번에 무너뜨리는데 자식을 위한다는 방법이 자식에겐 스트레스라는 걸 본인은 모르고 계신다. 지난겨울에도 그랬다.

언제 하셨는지 홀로 배추 50포기로 김치를 담그고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김장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김치통 큰 걸로 4개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아이들이 그만 잠이 들었다. 시댁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깨웠더니 찬바람 때문인지 징징대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서니 좁은 골목에 동네 사람들이 아이 울리면서 다닌다고 욕한다며 역정을 내셨다.

그리고 김장하는데 며느리들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야단치며 '아들 없다' 소리 듣지 말고 어서 아들 낳으라고 난데없이 불똥이 튀었다. 딸 둘이라고 한사코 아들 낳을 것을 재촉하시는데 '아들은 나 혼자 낳나!'하며 속상해서 이러고 말았다.

"이제는 저희 김치 담그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볼 때마다 아들, 아들 하니까 얼마나 속상한지.

그 후 어머님은 평소 챙겨주시던 된장, 간장, 김치, 장아찌 등 일체의 밑반찬 가져가란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배추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요즘, 어머님이 해 주신 김치가 그립다. 그때 괜히 큰소리쳤나 싶어 후회막급이다.

박선영(대구 달서구 유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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