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소천면 현동3리 배나들마을 이모 씨는 1984년 현동터널 개통식을 앞두고 멀쩡한 집을 뜯어내야 했다. 울진과 봉화를 잇는 36번 국도를 포장하고, 터널을 뚫을 때였다. 도로 평탄작업에는 군인은 물론 소천면 사람들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부역에 동원됐다. 문제는 개통식에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것. 36번 국도변 다른 집은 모두 지붕만 개량했지만, 이 씨 집은 아예 헐어내고 집 방향을 바꿔야만 했다. 이 씨 집이 대통령이 지나가는 도로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주 낙동과 의성 낙정에 가면 일명 '선거다리'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원성이 강하게 묻어 있는 다리다. 공식 명칭은 '낙단교'. 상주 낙동면의 '낙'자와 의성 단밀면의 '단'자를 땄다. 박 전 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주민 숙원인 다리 건설을 약속했다. 하지만 수심이 깊고 암반이 많다는 이유로 낙단교 대신 1966년 고향 구미에 일선교를 세웠다. 낙단교는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로 75년 교각 6개를 놓았지만 이후 예산부족으로 한동안 공사가 중단됐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선거 때마다 다리 완공을 공약했으나 번번이 약속을 저버렸다. 낙단교 준공식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986년에야 열렸다. 주민들은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헛공약을 내세운 것에 빗대 '선거다리'란 별칭을 붙였다. 전직 대통령 2명을 거쳐 완공된 다리여서 '대통령다리'(President Bridge)로도 불릴 만하다.
"인민위원장 했던 안선오, 토지분배위원장 신하규, 자위대장 했던 김재덕, 그리고 여자 한 명 그래 너인가 죽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 대화가 아니다. 의성 단밀면 낙정2리 정종철(79) 씨는 6·25 당시 숨졌던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상황을 뚜렷이 기억했다. 인민군들이 두 달이나 주둔했던 마을이다.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 직책을 맡았던 이들이 국군 선발대가 들어오자 스스로 그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곧바로 총살당했다고 했다.
36번 국도, 선거다리, 6·25에 얽힌 윗글은 모두 '신낙동강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 연재과정에서 주민들이 쏟아낸 생생한 증언이다.
경북은 근현대 격변의 역사와 향기 짙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다리가 없어 나룻배를 타고 달렸던 버스, 마을 아낙네들이 1년 중 봄날 하루 일손을 놓은 채 놀러가는 풍습인 '희초', 강과 강을 잇는 줄을 탄 광대놀이, 부산 소금장수와 영남 소장수들이 넘었던 고갯길 등등.
디지털, 스마트폰 시대다. 21세기 1, 2년 동안의 변화는 70년대 근대화 이후 아날로그 시대 30여 년의 변화를 무색하게 할 만큼 속도가 빠르다. 20세기의 역사와 문화, 풍속은 급격하게 잊혀져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질곡과 격동의 역사를 증언할 이들은 대다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6·25의 처절한 경험과 보릿고개 시절을 얘기할 이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낙동강사업, 공단 건설을 비롯한 각종 개발로 경북의 지형과 모습도 크게 바뀌고 있다.
20세기의 추억과 유산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문화·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경북의 스토리를 묶어내고 기록할 과제가 시급하다. 그 추억과 유산을 증언할 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문자를 통해 한국 고대의 역사를 전하듯 20세기의 격변을 경험한 이들과 녹음, 사진, 영상을 잘 접목한다면 훌륭한 경북유사, 경북사기가 될 수 있을 터이다. 20세기를 기록할 책무는 바로 21세기 우리에게 있다.
김병구 사회2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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