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문서 화악까지] <49> 남부외곽능선

'상여덤∼가마봉∼고둥덤' 열차처럼 이어진 비슬릿지 아찔

20호선 국도의 풍각 지점 확장된 구간서 바라본 비슬산 남쪽 모습. 강우관측소가 들어서서 시각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된
20호선 국도의 풍각 지점 확장된 구간서 바라본 비슬산 남쪽 모습. 강우관측소가 들어서서 시각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된 '칠분지'가 최고봉인 듯 솟아 보인다. 그 서편에는 동그마한 암괴덩어리를 머리에 인 '가마봉'이 있고 그걸 거쳐 흐르는 남서외곽 짐실능선이 짚인다. 동편으로는 낮게 이어가는 남동외곽 소말능선 및 그 북편으로 잠깐 더 높게 달리는 칠분지 동릉이 보인다. 천왕봉·대견봉 등등은 있는 줄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림자마저 안 잡힌다. 이렇게 보는 지점에 따라 전혀 모습을 다르게 나타내기 일쑤인 게 산이다.

비슬산 주능선 남부종점 990m봉은 일대 산줄기 흐름 상 매우 중요한 지형이다. 비슬산을 얘기하는데 이름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990m봉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돌출봉이다. 특히 남쪽서 보면 그렇다. 그쪽 부분이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절벽으로 깎인 결과다. 그 남동쪽 비티재나 남서편 아래 창녕 성산면 대산리 월곡마을서 보면 실감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제대로 된 명칭이 없다. 그 남쪽 바로 밑 풍각면 화산리 '원명'마을 어르신들은 그 아래 골 이름을 따 '신주골 만댕이'라고만 불렀다. 남동쪽 풍각면 상수월마을서는 비슬산 산내 공간으로 들어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어서 '대문'이라는 말로만 가리켜 왔다고 했다. 동쪽 각북면 남산리서는 그 일대 암릉을 합쳐 '기차덤'이라 부른다고 했다. '비슬릿지'라 불리는 비슬산 최고의 암릉이 거기에 열차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남서편 창녕 월곡마을 어르신은 이름 없이 그냥 "기슭에 맷돌샘이라는 게 있고 옛날 정씨네가 피난했던 곳으로 전해져 온다"고만 했다. 서쪽 유가면에서도 여기저기 수소문했으나 거기서는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 봉우리여서 그런지 더 관심 없었다.

다만 한번 귀가 번쩍 뜨였던 건, 화산리 동원마을 어느 어르신이 '상여덤'이란 이름을 기억해냈을 때였다. 옛 어른들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모습 또한 그걸 연상시킬 만하니 가능성 있을 듯도 했다. 하지만 같은 이름을 기억하는 다른 어르신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저 상여덤 혹은 990m봉은 비슬산 남부외곽능선에 솟은 3개의 특출한 암봉 중 첫째 것이다. 둘째 셋째 것은 거기서 서쪽으로 이어가는 '짐실능선' 위의 '가마봉'(992m)과 '고둥덤'(877m)이다.

짐실능선은 990m봉을 출발해, 880m잘록이(경남·경북·대구 분계점), 933m봉(금수덤분기점), 890m잘록이, 가마봉(992m), 969m봉, 880m잘록이(임도종점), 926m봉, 920m봉(대구시계능선 분기점), 858m잘록이, 고둥덤(877m), 792m잘록이를 거친 후 '달등'(827m)으로 마지막 솟았다가 급락한다. 990m봉서 '달등'까지는 3.7㎞ 정도, 저 산줄기 흐름을 거슬러 그 기슭을 타고 오르는 게 소재사(消災寺) 절 진입로다.

990m봉서 17, 18분 걸려 도달하는 첫 잘록이(880m) 구간에는 그곳이 경남(창녕)·경북(청도)·대구(달성) 3도 분계점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도 경계선은 대개 높은 산줄기를 따라 설정되나 이곳서는 저 잘록이 아래 펼쳐진 '신주골' 복판 물길을 따라 그어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주골 물은 '화악분맥' 서쪽 창녕 땅으로 흘러감으로써 청도 물 중 유일하게 외지로 유출되는 경우가 됐다. 같은 연유로 신주골 하류 '원명' 마을은 동일한 이름을 쓰면서도 청도 풍각면 화산리 소속과 창녕 성산면 대산리 소속 둘로 나뉘기도 한다.

880m잘록이서 2, 3분이면 올라서는 933m봉은 '금수덤'(869m)이라는 특별한 절벽 암봉으로 가는 능선의 출발점이다. 10분 정도 걸어 닿는 금수덤은 비슬산 서편 마을들에서 '가마봉'과 더불어 가장 저명한 지형이다. 그 북쪽 '큰골'서 매우 찬란히 바라다보이는 동시에, 올라서면 저 멀리 와와산성까지 한눈에 짚일 정도로 일망무제다. 바위틈서 노란 금빛을 띤 신비한 금수(金水)가 난다고 해서 예부터 유명했던 곳이라고도 했다.

저러한 금수덤을 청도 남산리나 원명마을 등에서는 '금수덤'이라 하는 반면 달성 유가 쪽에서는 '금수암'이라 불렀다. 암자 이름인 줄 착각해 절 표시(卍)까지 해 놓은 사찬(私撰)지도가 간혹 발견되는 이유다. '금수덤'으로 고정시키는 게 좋겠다. 거기서는 큰골 아래·위로 연결되는 산길이 나있어 접근성도 좋다.

금수덤 분기점(933m봉)을 지나 짐실능선을 이어 걸으면 15분여 후엔 '가마봉'(992m)에 도달한다. 주변 여러 마을들에서 두루 바라다보이는 특출한 암봉이다. 북쪽의 유가면 양리·음리는 물론 남쪽의 풍각 서원·원명마을서도 그렇다. 그 정상에는 2년 반 전 어느 산악회가 세웠다는 '觀機峰'(관기봉)이라는 표석이 서 있다. 관기 스님의 거처였으리라 보고 고지도에서 발견되는 그 이름을 갖다 붙인 모양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 봉우리를 관기봉이라 부르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유가면 양리·음리서는 일관되게 '가마봉'이라 했고 '시루봉'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서편 짐실마을(유곡리)서는 '곰피덤'이란 보다 특별한 명칭이 통했다. 그 북편 가재마을 어떤 이는 그걸 '조화봉'으로 알고 있었다. 남쪽 풍각·성산(창녕)서는 '경기덤' 혹은 '경기바위'라 불렀다. '궁기덤'(천왕봉)의 '궁기'와 함께 '관기 스님'의 '관기'가 변해서 생긴 게 '경기'라는 단어일지 모르겠다.

가마봉서는 비슬산 서편 산내공간에 중요한 칸막이를 치는 상당히 긴 '필봉능선'이 내려선다. 599m봉~'애미고개'~'금장고개'~필봉(筆峰·483m)을 거쳐 흐르면서 소재사 쪽 '국밭골' 수계와 그 바깥의 '가재골' 수계를 가르는 산줄기다.

그 중 599m봉은 국가기본도에 '애미고개'라고 표시돼 있는 지형이다. 하지만 그건 고개가 아니라 봉우리이고, 현지서는 '시목봉'으로 불린다고 했다.

진짜 애미고개는 그 아랫자락 해발 475m쯤 되는 지점에 있었다. 이 산줄기 남쪽의 용리 가재마을서 지금의 소재사 입구 사설주차장 안 토종벌 농장을 거쳐 북쪽 소재사로 다니던 옛 시절 유일한 길목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재(잘록이)가 아닌 비탈면을 마냥 넘도록 나 있는 통로였고, 길 흔적은 지금도 완연하나 칡넝쿨이 워낙 굵게 자라 통행도 불가능했다.

'금장고개'(430m)는 자동차시대를 맞아 애미고개 대신 부상한 길목이다. 가재마을과 공설주차장이 있는 북편 '금장골'을 연결하는 동시에 휴양림(소재사) 들머리도 돼 주기 때문이다. '필봉'(483m)은 금장고개를 지나 다시 올라선 구간에 솟은 최고봉이다. 붓끝처럼 뾰족한 봉우리에는 대개 저 이름이 붙는다.

만약 금장고개서 거꾸로 저 필봉능선을 걸어올라 가마봉을 지나고 주능선을 거친 후 북서외곽으로 향한다면, 어느덧 비슬산 외곽 환종주에 나선 모양새다. 그런 다음 와와능선을 거쳐 팔장군묘에서 양지편마을로 내려서는 것으로 완성되는 환종주 코스는 만 하룻길이다.

'가마봉'서 다시 짐실능선 산길을 따라 걸으면, 969m봉 지난 지점의 잘록이(880m)에서 어느 순간 임도를 맞닥뜨리게 돼 놀랄 수 있다. 남쪽의 창녕 안심마을서 올라온 것이다. 그쪽서는 자동차로도 가마봉 근처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저 임도 잘록이를 지나고 평범한 육봉(肉峰·926m)을 하나 거치면 대구시계(市界)능선 분기점(920m봉)에 닿는다. 유가면 가태2리 석샘마을 상부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거기서 갈라져 가는 시계능선은 잠깐 사이 916m봉으로 옮긴다. 대단한 단애로 치장해 스스로도 '갈봉'이라는 명칭을 얻어있을 뿐 아니라 '벼락덤'이라는 또 다른 벼랑바위까지 달고 있는 봉우리다.

그 다음 시계능선은 '용고개'(500m)로 하강했다가 다시 솟아 또 다른 큰 산덩이를 형성한다. 유가면 가태2리 동쪽이자 본말리 북쪽에 펼쳐진 최고점 높이 750m의 산괴다. 저걸 가태2리서는 '달등'이라 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곳에도 나타나는 지명이니, 이 산덩이에는 '상사바위등' 정도의 임시명칭을 붙여놓으면 혼란이 없을 듯하다. 천왕봉의 궁기덤 비슷한 모양새로 서쪽을 향해 입 벌린 '상사바위'가 거기서 이름난 지형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대구시계능선을 갈라 보낸 후 짐실능선은 920m봉을 지나 '고둥덤'(877m)이란 이름의 남부능선 세 번째 암봉으로 솟는다. 고둥을 닮아 저런 이름이 붙었는가 싶은 대단한 바위봉우리다. 남쪽 석샘마을보다 북편 가재마을서 더 선명하게 윤곽을 볼 수 있다.

고둥덤을 지나면 산줄기는 해발 800m 이하로 낮아졌다가 마지막으로 827m봉을 올려 세운다. 그 서쪽에 있는 짐실마을서는 이걸 '달등'이라 했다. 달이 그쪽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뜻으로만 본다면 옛 기록에 나오는 '월선봉'(月先峰)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르신들은 거기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즐비하다고 했다. 시기 놓치기 전에 지형지물 전래명칭 조사를 서둘러야겠다.

이로써 비슬산의 서사면 산내(山內) 공간은 그 외곽능선까지 대충 살핀 셈이다. 그러나 전모를 살피는 일은 그 정도로 충분할 수 없다. 더 서쪽의 산 밖으로 나가 5호선 국도에 서서 비슬산을 살펴보는 일이 남았다. 옛 현풍현 지지나 고지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될까 해서다. 바로 그렇게 살펴 기술하고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국도 변에 서면 비슬산 윤곽은 산 위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다르게 잡힌다. 산줄기로 연결돼 보이지 않고 거의 독립했다싶은 다섯 개의 큰 덩어리로 떨어져 보이는 것이 첫째 차이다. 와와산성 중심으로 뭉쳐져 보이는 북서외곽능선이 하나, 천왕봉(최고봉) 일대 덩어리가 둘, 대견봉(1,035m봉) 및 그 외호산줄기 덩어리가 셋, 짐실능선 봉우리들이 달등을 중심으로 뭉쳐 보이는 산덩이가 넷, 본말리 뒷산 덩어리라 했던 '상사바위등'이 다섯이다.

그럼, 저 다섯 중 가장 뚜렷하고 커 보이는 것은 어느 산덩이일까? 천왕봉? 대견봉? 아니다. 놀랍게도 그건 달등 일대의 짐실능선 산덩이다. 덩치가 큰데다 주능선서 서쪽으로 3.7㎞나 돌출한 게 원인일 것이다. 대부분 등산객들이 그 존재조차 잘 모르고 있을 산덩이가 최대로 부각하는 것이다. 이게 둘째 차이다.

모르긴 해도, 고지도를 읽으려면 무엇보다 이런 현장 감각부터 갖출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 근처에 '대견리'라는 마을이 있으니 달등 일대가 옛사람들이 말한 대견봉일 개연성까지 살펴야 할지 모른다. 비슬산의 일부인 줄조차 모르고 있었던 '상사바위등'이 옛 지도들이 특별히 주목한 '조화봉'일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다. 방에 들어앉아 조그만 봉우리나 살피는 자잘한 눈으로는 안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남부외곽능선 중 남서능선은 저렇게 990m봉서 바로 출발하지만, 남동능선은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다가 동쪽으로 굽는다. 990m봉서 화악산으로 이어가는 '화악분맥' 노선을 700여m 더 타고 흐르다가 갈라지는 것이다. 거기 해당하는 화악분맥 구간이 앞서 '비슬릿지' 혹은 '기차덤'으로 불린다고 했던 그 암릉이고, 그걸 지나 도달하는 해발 920여m 되는 지점이 남동능선 분기점이다.

920m분기점 이후 남동능선은 북편의 각북면(남산리)과 남쪽의 풍각면(수월리)을 가르며 동쪽으로 달린다. 그래서 그 등산로는 북편 남산리와 남쪽 상수월마을 양쪽에서 모두 이어져 있다. 남산리 등산로의 경우 애골로 들어서서 오르다가 남동능선의 3차 지릉을 걸어 본능선과 합류하도록 나 있다.

남부외곽능선은 이렇게 해서 비슬산 산내(山內)공간을 마감하면서 남쪽으로 '산남(山南)공간'이라 할 만한 새로운 세계를 연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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